우규민이 LG에 돌아옵니다. 2009 시즌 종료 후 입대한 우규민은 2011년 15승 무패 1세이브로 소속팀 경찰청이 라이벌 상무를 꺾고 퓨처스 북부 리그에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등공신이 된 바 있습니다. LG에서는 주로 마무리와 중간 계투를 담당하던 우규민은 경찰청에서 선발 투수로 보직을 바꿔 많은 이닝을 소화하면서 종으로 떨어지는 변화구를 장착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우규민의 가세로 LG는 양적으로 강력한 사이드암 투수진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지난 시즌 13승을 거두며 LG의 에이스로 발돋움한 강속구 투수 박현준과 61경기에 구원 등판해 3승 13홀드로 허리를 지킨 김선규의 동갑내기 콤비, 그리고 LG의 대졸 1차 지명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김기표와 신정락까지 1군에서 가용 가능한 5명의
2011년 LG는 9년 연속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의 불명예 신기록을 수립했습니다. 5년 임기로 계약했던 박종훈 감독은 2년 만에 중도 사퇴하고 김기태 수석 코치가 신임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훌륭한 프로야구 감독이 되기 위한 자질을 손꼽으면 다양한 요건이 제시되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원칙에 충실하고 단기적으로는 임기응변에 능한 것이 필수 요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장기적으로는 선발 로테이션, 계투진 운영, 부상 선수 관리 등에 있어 원칙을 고수하며 단기적으로는 매 경기, 매 이닝마다 다양한 작전과 적재적소의 선수기용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그러나 지난 5년 간 LG의 사령탑이었던 김재박 감독과 박종훈 감독은 장기적으로는 임기응변에 능하고 단기적으로는 답답하리만치 원칙을 고수했습니다.
프로야구 원년 MBC 청룡 이래 LG에는 훌륭한 주전 포수의 명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원년에는 주전 김용운과 공격형 포수 유승안이 있었으며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우승 주역이었던 롯데 심재원이 1985년 김용운과 맞트레이드 되기도 했습니다. 심재원은 1990년 LG 우승 당시 신인 김동수와 번갈아 기용되었는데 마무리 정삼흠과 함께 경기 후반 출장해 ‘세이브 포수’로 불리기도 했습니다.1990년과 1994년 LG 우승 주전 포수였던 김동수에 대해서는 두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며 2000년대 LG의 주전 포수 조인성 역시 국가 대표에 여러 차례 선발된 훌륭한 포수였습니다.그러나 FA 협상이 결렬된 조인성이 SK로 이적한 후 LG의 주전 포수 자리는 무주공산이 되었습니다. 현재 LG에서 내년 시즌
마라톤에 비유되는 프로야구 페넌트 레이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상자를 최소화해야 합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보유해도 부상자가 속출한다면 결코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삼성이 페넌트 레이스 및 한국 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롯데가 사상 첫 페넌트레이스 2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부상 선수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1차적으로는 부상 선수가 발생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경기를 치르다보면 부상 선수는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정확한 진단과 재활 과정을 통해 그라운드에 조속히 복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두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하지만 지난 시즌 8개 구단 중 가장 많은 부상 선수가 속출했던 LG의 경우 구단 지정병원의 진단이 과연 정확했던 것
LG 이대형은 2007년 0.308의 타율과 자신의 등번호와 같은 53개의 도루로 도루왕과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며 최고의 한해를 보냈습니다. 이후 이대형은 다시 3할 타율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했고 2명의 감독으로부터 주전으로 신임을 얻었습니다. 2009 시즌을 앞두고 히어로즈로부터 이택근이 영입되어 이대형은 벤치로 밀려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지만 빗나갔습니다.2011 시즌은 2007 시즌 이후 최악의 해가 되었습니다. 연이은 부상으로 1군 엔트리에서 제외되었으며 5년 연속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타율도 0.249로 어지간한 내야수에도 못 미치는 저조한 기록을 남겼습니다.2012 시즌을 앞두고 롯데 김무관 타격 코치가 LG에 영입되면서 이대형의 고질적인 약점인
2012 시즌을 앞두고 LG 선수단의 등번호가 대폭 변경되었습니다. FA 이적과 군 입대 및 제대 선수들로 인해 크게 변화된 것입니다.지난 시즌 1번을 달았던 임찬규는 경찰청에서 제대한 우규민에게 등번호를 돌려주고 이택근이 달았던 29번을 달았습니다. 군에 입대한 박경수를 대신해 6번의 주인은 윤진호가 되었습니다. 2차 드래프트로 친정팀으로 돌아온 최동수에게 32번을 반환한 윤상균은 FA로 이적한 조인성의 44번을 달았습니다. 시즌 중 트레이드되어 이적 맞상대였던 박병호의 25번을 달았던 김성현은 0번으로 새출발합니다.흥미로운 것은 7번을 달았던 오지환이 상무에 입대한 이범준의 52번으로 바꾸면서 7번의 새로운 주인이 작은 이병규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행운을 상징하는 등번호 7번은 LG의
성남고 박병호와 부산고 정의윤은 고교 무대를 평정한 대형 타자로 각광받으며 2005년 나란히 LG에 입단했습니다. 박병호는 1차 지명으로 3억 3천만 원의 계약금을, 정의윤은 2차 1라운드 3순위로 2억 3천만 원의 계약금을 받았습니다. 두 선수가 그해 LG의 신인으로 첫 번째와 두 번째 순위로 지명되었다는 사실과 더불어 거액의 계약금은 당시 얼마나 많은 기대를 받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두 선수를 굳이 비교하면 지명 순서와 계약금액에서 박병호가 정의윤보다 많은 기대를 받았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 무대에서의 적응은 박병호보다 정의윤이 빨랐습니다. 2005년 106경기에 출장해 타율 0.242 8홈런을 기록한 정의윤은 79경기에 출장해 0.190의 타율 3홈런에 그친 박병호보다 나은 기록을 남
야구에서 강타자의 기준으로 첫손에 꼽히는 것은 3할 타율입니다. 10번 타석에 나와 3번 안타를 기록해야 달성할 수 있는 3할 타율에 오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2011 시즌 3할 타율에 오른 선수는 8개 구단 통틀어 단 14명에 불과합니다. 산술적으로 각 팀 당 채 2명이 되지 않으며 어떤 구단은 단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한 것이 3할 타자입니다.따라서 어떤 타자가 달성한 3할 타율을 ‘무의미하다’고 규정한다면 야구에 대해 무지하다거나 혹은 매몰찬 평가절하라는 비판을 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LG 박용택이 2011 시즌 달성한 3할 타율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박용택은 2011 시즌을 앞두고 장타자로의 변신을 선언하며 근육을 불렸습니다. 외야수들의 포지션 중복과 자
올 시즌 LG 트윈스의 133경기 중 38경기를 직접 관전했습니다. 그 중 5번의 명승부를 꼽아봤습니다.1위 7월 6일 대전 한화전 - 이병규, 9회 역전 만루포 5:4로 뒤진 9회초 무사 만루에서 이병규가 한화 박정진의 2구를 받아쳐 역전 만루 홈런을 터뜨리며 전날 끝내기 패배를 설욕했습니다. 선발 박현준을 불펜으로 돌리는 초강수에도 불구하고 8회말 강동우의 솔로 홈런으로 패색이 짙었던 경기를 일거에 뒤집은 것입니다. 자세한 후기 바로 가기2위 5월 4일 잠실 두산전 - 이병규, 연타석 2점 홈런 두산 선발 니퍼트의 호투에 밀려 1:0으로 뒤지던 LG는 7회초 이병규의 좌월 2점 홈런으로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이동현의 난조와 야수들의 수비 불안으로 3:
어제 개최된 2011 프로야구 골든 글러브 시상식에서 LG는 단 한 명의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했습니다. LG는 3명의 골든 글러브 후보를 배출했는데 그 중 외야수 부문에서 이병규의 수상이 유력시되었기에 수상 실패는 충격적입니다.개인 기록만 놓고 보면 0.338로 타율 3위, 164개로 최다 안타 2위를 기록한 이병규를 넘어서는 외야수는 홈런 및 타점왕을 차지한 삼성 최형우밖에 없습니다. 만 37세의 팀 최고참임에도 불구하고 외야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한 이병규의 팀 공헌도는 매우 높았습니다.하지만 이병규는 최형우는 물론이고 롯데 손아섭과 KIA 이용규에게도 밀리며 수상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득표수에서도 롯데 전준우에 밀리며 5위에 그쳤습니다. ‘(자신이) 수상하지 못할까봐 예비 신부를 데려오지 않았다
LG는 한화에 입단한 FA 송신영의 보상 선수로 포수 나성용을 지명했습니다. 연세대를 졸업한 나성용은 2011 신인 드래프트에서 3차 17순위로 한화에 입단한 신인 포수로 20명의 보호 선수 명단에 오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의외라는 반응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한화로서는 신경현, 박노민, 정범모에 상무 입대를 앞둔 이희근까지 포수 자원이 넉넉해 병역 미필인 나성용을 보호 선수 명단에 포함시킬 수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나성용이 보상 선수로 결정되자 2007년 진흥고 3학년에 재학 당시 LG가 지명했으나 연세대에 진학한 사실을 상기해 LG의 ‘집념의 지명’이라며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충암고 재학 시절 LG의 지명을 받았으나 이를 거부해 동국대에 진학한 뒤 2010년 LG 유니폼을
LG는 한화로 이적한 FA 송신영의 보상 선수로 포수 나성용을, 넥센으로 이적한 이택근의 보상 선수로 투수 윤지웅을 지명했습니다. 두 선수 모두 2011 시즌 신인으로 즉시 전력감보다는 미래를 위한 선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흥미로운 것은 윤지웅의 데뷔 첫 승 상대가 LG였다는 사실입니다. 윤지웅은 7월 19일 목동 LG전에 1:1로 맞선 10회초 1사 1, 2루에서 구원 등판해 이진영을 6-4-3 병살타로 처리해 실점 위기에서 벗어난 뒤 10회말 강정호의 끝내기 안타로 데뷔 첫 승을 거둔 바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당시 패전 투수가 된 것은 심수창으로 최다 연패 타이 기록(16연패)을 세웠으며 이후 심수창은 7월 31일 트레이드되어 넥센 유니폼을 입게 되었습니다. 시즌 후 넥센에서 LG로 온 윤지웅이 데뷔
2011년 LG는 또 다시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5년 임기로 계약했던 박종훈 감독은 2년 만에 자진 사퇴했습니다. 하지만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질적인 약점인 내야진에서 전혀 기대하지 않은 서동욱이라는 신데렐라를 발견했습니다.서동욱은 2003년 경기고를 졸업하고 KIA에 2차 1라운드 4순위로 지명되어 1억 8천만 원의 계약금을 받고 입단한 유망주였습니다. 박경수, 지석훈, 나주환과 함께 고교 무대를 평정한 내야수로 각광받은 것입니다. 하지만 서동욱은 KIA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한 채 3년 간 도합 100경기 남짓을 출장하는 데 그쳤고 2005년 말 3:3 트레이드를 통해 LG 유니폼으로 갈아입었습니다.트레이드 이후 상무에서 군 복무를 시작해 2007년 스위치 히
‘LG는 겨울에만 야구한다’는 우스개 소리가 회자되곤 했습니다. 매년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로 가을에는 야구하지는 못하고 대신 겨울에 스토브 리그가 되어서야 FA, 트레이드, 방출 선수 영입, 신인 계약, 전지훈련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입니다.하지만 2011년 LG는 스토브 리그 최강자로 자부할 자격을 상실했습니다. 페넌트 레이스 종료 시점부터 LG 프런트의 온갖 추문과 무능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왔기 때문입니다.시즌 종료를 앞두고 박종훈 감독의 자진 사퇴가 결정되면서 9년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지 못한 LG의 신임 감독 인선이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으나 장기간의 성적 부진에도 불구하고 LG 프런트는 재야의 유능한 감독들을 외면한 채 김기태 수석 코치의 감독 승격을 발표했습니다. 2년 전
삼성이 아시아 시리즈 결승전에서 일본시리즈 우승팀 소프트뱅크를 4시간에 육박하는 접전 끝에 5:3으로 물리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선발 장원삼의 호투와 5회초 폭발한 타선에 힘입어 역전승했습니다.선취점은 소프트뱅크의 몫이었습니다. 1회말 2사 3루에서 마쓰다의 적시타로 득점한 것입니다. 1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발 빠른 혼다를 볼넷으로 출루시켜 도루를 허용한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더욱 아쉬운 것은 2사 3루 마쓰다 타석 볼 카운트 0-3에서 장원삼이 한복판 높은 직구로 적시타를 내준 것입니다. 2사 후였으며 1루가 비어있었고, 5번 타자 하세가와가 마쓰다에 비해 위협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마쓰다는 거르고 하세가와와 승부하는 편이 나았지만 0-3에서 스트라이크를 잡으며 무리하게 승부하려 한 것은 본헤드 플
2011 아시아 시리즈 3일째 경기에서 삼성이 퉁이를 6:3으로 꺾고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8회초 터진 최형우의 결승 2점 홈런과 2.1이닝 동안 단 한 명도 출루시키지 않은 권오준의 완벽한 호투가 승인입니다.삼성은 3회초와 4회초 연속 득점하며 3:0으로 앞서갔습니다. 하지만 4회말 1실점하며 추격의 빌미를 허용했습니다. 무사 1루에서 궈타이치의 땅볼 타구를 4-6-3의 병살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김상수가 1루에 악송구해 1사 2루로 만들어준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2사 주자 없는 편안한 상황이 되었어야 했지만 득점권까지 진루를 허용한 것입니다. 이후 양송시엔의 빗맞은 적시타로 3:1이 되었는데 삼성이 득점한 직후에 실책으로 실점했다는 점에서 문제였습니다.6회말에는 두 번째 투수 권혁이 대타 궈
최근 LG는 좌완 투수 서승화를 민경수, 지승환과 함께 보류 선수 명단에서 제외했습니다. LG에서 계약을 포기하고 방출한 서승화를 데려가는 구단이 없을 경우 이대로 은퇴하게 됩니다.대전고, 동국대를 졸업한 서승화는 1998년 2차 3라운드 23순위로 지명되어 2002년 LG에 입단했습니다. 195cm의 장신에서 뿜어내는 강속구가 주무기로 ‘지옥에서라도 데려와야 하는 좌완 파이어 볼러’였기에 계약금 5억원이 말해주듯 엄청난 기대를 받았습니다.하지만 서승화는 기량보다는 경기 외적으로 주목받는 선수였습니다. 2003년에는 삼성 이승엽과의 빈볼 시비와 주먹다짐으로 유명해졌고 2004년에는 두산 윤재국의 다리를 거는 비신사적 행위로 징계를 받기도 했습니다. 이후 윤재국은 병역 비리에 연루되기도 했지만
대만 타이중에서 열린 아시아 시리즈에서 삼성이 일본시리즈 우승팀 소프트뱅크에 9:0으로 참패했습니다. 투타는 물론 수비까지 모두 낙제점에 불과한 졸전으로 콜드 게임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삼성이 한국시리즈 엔트리에서 포함되지 못한 이우선을 선발로 기용한 것은 첫째, 차우찬, 윤성환, 안지만이 이탈하면서 마땅한 투수가 없기 때문이었으며 둘째, 소프트뱅크에 패하더라도 내일 대만 대표 퉁이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면 결승전에 진출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이우선이 예상 외로 호투하고 타선이 터져 앞서갈 경우 필승계투진을 가동한다는 복안도 있었으나 이우선은 2회초부터 허망하게 무너지며 삼성이 버리는 경기가 되었습니다. 1회초 1사 1, 2루에서 소프트뱅크의 중심 타선을 상대로 실점
일본 시리즈 우승팀 소프트뱅크가 대만 대표 퉁이와의 경기에서 3회말 잡은 리드를 끝까지 지키며 6:5로 신승했습니다. 상위 타선의 집중력과 후지오카, 아라카키로 이어지는 계투진의 호투가 승인입니다.초반부터 경기 흐름은 크게 요동쳤습니다. 양 팀 공히 선발 투수가 조기 강판되는 가운데 공격에서 아쉬운 플레이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1회말 소프트뱅크는 마쓰다의 중전 적시타로 선취 득점했으나 계속된 1사 1, 3루 기회에서 1루 주자 마쓰다가 퉁이 선발 글린의 견제구에 걸려 아웃되어 흐름을 끊었고 소프트뱅크는 추가점을 얻지 못했습니다.2회초에는 퉁이가 장타이샨의 2타점 적시 2루타로 2:1로 역전했으나 계속된 무사 1, 2루 기회에서 가오즈강이 희생 번트에 실패해 2루 주자 장타이샨이 3루에서 포스 아웃되
삼성이 3년 만에 부활한 아시아 시리즈에서 호주 대표 퍼스 히트를 10:2로 물리치며 서전을 승리로 장식했습니다. 선발 장원삼의 호투와 박석민의 공수에서의 대활약이 돋보였습니다.전력만 놓고 보면 퍼스는 삼성보다 한 수 아래이지만 퍼스는 자국 리그의 시즌 중에 아시아 시리즈를 치르게 되어 실전 감각에 문제가 없었던 반면 삼성은 10월 31일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한 달 가까이 경기를 치르지 않아 실전 감각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삼성이 초반에 퍼스에 끌려갈 경우 고전할 가능성이 적지 않았습니다.1회초 2사 1, 2루의 실점 위기에서 맷 케넬리의 안타성 타구를 박석민이 다이빙 캐치해 아웃 처리한 호수비가 삼성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만일 박석민이 처리하지 못했다면 좌익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