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고 지지하는 것 이상의 책임은 우리에게 없나? 파업하고 단식 중인 MBC 노동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책임 질 것인가? 지금 MBC에서 벌어지는 사태는 우리와 무관한, ‘그들’만의 문제이고 ‘그들’끼리의 사안인가? 끝장날 수밖에 없는, 누군가 죽어야 상대가 사는 그런 막장 싸움판인 게 맞는가? 그래서 더 이상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나? ‘업무방해’ 혐의로 민·형사 고발 조치를 취한 사장과 ‘불법 집단행동’이 계속된다면 주도자는 물론 참가자에 대해서도 “법과 사규를 엄중하게 적용”하겠다는 사측에 맞서,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또 고민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우리, 바로 우리가. 이근행 본부장의 오 일째 접어드는 단식투쟁에 노조원 22명이 실명 동조하고 나섰다. 이들은 ‘동조단
최근 러시아에서 발생한 비행기 추락사건으로 대통령을 비롯해 탑승객 96명 모두가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을 때, 폴란드 ‘국민’들의 비통은 참으로 컸을 것이다. 폴란드 정부가 일주일 동안을 애도기간으로 선포했다. 천안함 사고로 죽은 젊은 청년들을 기억하기 위해 정부가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는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정부는 영결식까지의 5일을 ‘국가애도기간’으로, 영결식이 열리는 29일을 ‘국가애도의 날’로 정했다. 사고 원인을 밝히고 진상을 규명하는 일과 별도로, 죽은 군인들을 기억하고 그 유가족들과 아픔을 함께 하는 것은 시민의 공통된 의무다. 사실 정부가 국가애도기간을 선포하는 일은 외국의 경우에도 전혀 드문 일이 아니다. 죽은이가 많고 적음은 아무 문제가 안 된다. 메
인정한다. 역시 최승호 피디는 대단했다. 파업 중인 상황에서 자신이 직접 취재한 것을, 자신이 직접 사회보고, 또 자막을 보면 자신이 직접 연출해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냈다. 1인 3역이다. 검사와 스폰서, 성 접대라는 게 전혀 새로운 소재는 아니고, 또 결정적이고 확실한 제보자가 있었던 게 맞지만, 그래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다. 만약 엠비씨 노동자들의 파업이 없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김재철 사장 등등이 자리에 안착해 검찰 권력의 눈치를 보거나, 혹은 자체적으로 남은 ‘좌파’ 적출 미션을 계속했더라면 과연 이런 방송은 가능했겠는가? 촛불문화제 뒤풀이 자리에서 슬쩍 나온 이야기 정도로 넘기고, 파업 와중에 정규 프로그램 편성하는 걸 포기했다면 또 어땠
4.19혁명 50주년 하루 전날 밤 MBC를 통해 전국적으로 재방송된 은 한국 방송사에 오랫동안 남을 대 사건 중 하나로 당당히 기록되어야 한다. 의아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본 사람이 크게 많지 않거나 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마산 지역에 살지 않는다면, 밤늦게 딱 한번 이 단막 드라마로 봤을 뿐일 것이다. 그래도 충분하다.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 방송의 역사에 정확히 매김 되어야 한다. 이제 곧 20년의 생일을 맞이하게 될 의 역사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두 공감하겠지만, 이 드라마에 관해서는 많은 이들이 그냥 지나쳐버릴지도 몰라 이렇게 글로 새겨 놓는다. , , 와 같이 우리의 현대사, 지역의 문화, 민중의 삶을 늘 TV드라마 이야기
칼럼 쓰러 PC방에 오면서, 누구에게 편지를 쓸까 고민했어요. 그런데 종업원이 한글 프로그램 까는 동안에 정했어요. 명예훼손 고소를 당해 황당해 하는 원 선배에 관해 편지 보내기로요. 지난 목요일 오후 약간은 당황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했잖아요. “전 박사, KBS로부터 나 고소당했어!” 만약 누군가 내게 당신의 멘토는 누구냐고 물으면 나는 자랑스럽게 말해요. 서강대 원용진 교수라고요. 좀 닭살인가요? 허허. 좋아요. 그럼 말을 바꿀게요. 가끔 맘에 들지 않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선배라고 하죠, 뭐.문화연대 들어가기 전에 내가 선배를 얼마나 씹었던가요? 술만 취하면 온갖 욕설을 내뱉고 생 지랄을 하다시피 했었죠? 되도 않은 운동 때려치우라고, 가요순위프로그램 폐지운동이나 하는 단체하고
더 이상 이대로는 안 된다. 서둘러 끝을 내야 한다.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답답하며, 또 얼마나 불안한가? 유족들이 먼저 대의를 위해 양보하고 나서지 않았는가? 실종된 자식들을 찾는 작업을 포기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천안호를 물위로 인양하는 작업을 서두를 수 있게 되었지 않은가? 더 이상의 안타까운 희생을 피하기 위해 그렇게 결정한 유족들의 마음이 안타깝게, 절절하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대의’를 위한 희생은 이념과 정파, 그 모든 것을 떠나 아름답고 숭고하다. 이제 우리도 ‘대의’에 따라야 한다. 21세기 한국 현대사에 부끄러운 자취를 남기지 않기 위해, 천안호 사태의 이성적인 해결을 위해 각자의 책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우선 첫 번째, 누구보다 선한 저널리스트들이 나서야 한다. 말했듯
안녕 지연. 병원을 나선 게, 너랑 끝내 헤어진 게 아홉 시 약간 넘어서지? 방금 마을버스에서 내려 집 근처 정류장 앞 피시방으로 들어왔어. 너에게 보낼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쓸려고 말이야. 사실 많이 피곤하고 또 힘들어. 아냐. 이런 말 하는 내가 밉지? 너무 염치없지? 미안해. 오후 내내 강의하고 특강하고 그리고 네게 다녀오고, 그 정도로 이러면 안 되는 것 잘 아는데.사실 아침에 트위터 둥지 사람들에게 미리 말했어. 네가 내 ‘애인’이라고. 깜짝 놀랐을 거야 아마. 지연이 널 보러 갈 테니 함께 가고 싶으면 그래도 된다고. 여덟시쯤 보자고 했거든. 그래서 특강 끝나고 바로 너에게로 달려간 거야. 아쉽게도 아는 얼굴들은 아무도 없었어. 내 트위터 둥지가 너무 좁아 들은 사람들이 별로 없었나봐. 꼭
일요일 아침 게으르게 뒤척거리다가 부스스 일어난다. 건너 방으로 간다. 형수가 하도 맛있다고 해서 가져온 청도 감 말랭이, 금요일 저녁 늦게 청량리 시립대 가는 길목에서 산 과자 봉투들이 먼지들과 뒤섞여 뒹굴고 있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다. 뭐부터 시작하지? 따르릉. 엄마다. 당신도 몸 안 좋으시면서 목감기 지독히 걸린 자식 걱정에 아침부터 전화질이다. “밥은 뭤나? 잘 챙겨 먹고...” 늘 그 질문에 또 그 대답이다. 엄마 말대로 하이타이 좀 많이 넣고 빨래를 돌린다. 그리고 어제 입던 옷들로 엉망인 소파에 철퍼덕 엉덩이를 걸친다. 텔레비전을 켠다. 구질구질한 나의 삼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서해바다 어딘가에 있을 40여명 청년들의 비참을 원격으로 목격해서였을까? 아침부터 속이 불편하다
‘쪼인트’ 사건의 현실은 두 가지의 국면으로 나누어진다. 첫 번째는 그런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지 이른바 ‘버추얼’한 단계다. 이런 일은 그 이전의 골 복잡한 사정, 정황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뭔가 심각하게 꼬이고 비틀린 상황이 선행한다. 잠재된 모순과 내재한 갈등이 더 이상 봉합되지 못하고 그렇게 예상하지 못한 시간, 예측치 못한 곳에서 펑 터져 나오는 것이다. 방심 상태에서의 기밀 유출이라고나 할까? 이 사건이 지니는 함의, 의미심장한 신호를 제대로 읽어내야 한다. 이곳저곳에서 유사한 분출이 계속될 것이다. 권력 내부의 갈등과 불안 요인이 제거되지 않는 한, 쉽게 봉합되지 않는다. 요동은 앞으로 지속될 수밖에 없다. 이에 관해서는 특별히 내가 할 말이 없고 또 할
4월호가 말 그대로 대박을 터뜨렸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의 인터뷰에서 한 건을 올린 것이다. 정말로 희한한 일이다. 궁금한 것도 많다. 진짜로 MBC 김재철 사장은 ‘쪼인트’ 까인 것인가? 어디서 누구한테? 왜, 무슨 이유로? 김우룡 방문진 이사는 그 일을 어떻게 알았고, 왜 그걸 터뜨리려고 작심했을까? 삼척동자가 봐도 폭발적인 사안을 발설한다는 게 보통 마음을 먹지 않고서야 가능하지 않은 것 아니겠는가? 는 단순히 특종을 얻은 것이고? 그냥 사실을 옮긴 것이고? “MBC 좌파 대청소 70~80% 정도 정리됐다”는 이야기는 결론인가 예측인가? 그런 일 없다고 하고(김재철), 왜곡․과장됐다(방문진)고 항변한다. 그러나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들은 이제 말 그대로 끝났다. ‘쪼인트’란 말이
‘삼각동맹’. 내가 만든 것인지는 가물가물하지만, 내가 지금과 같은 미디어비평 잡글 쓰기를 통해 유행시키는 데 일조한 말임에는 틀림없다. 국가와 자본, 그리고 수구 미디어 권력의 상호의존적이고 근친적인 밀착관계를 고발하기 위해 만들어진 단어였다. 이후 많은 이들이 쓰고, 이제는 말 그대로 상투어가 되어 버렸다. 개념의 창조가 바로 철학이라고 할 때, 철학은 이제 대중지성의 교통공간을 통해 이루어지는 실천임에 확실하다. 각설하고, ‘삼각동맹’이라는 개념은 지금까지 주로 지배권력의 구성방식과 작동양식을 비판하기 위해 쓰여져 왔다. 신보수주의 정권과 신자유주의 자본권력, 그리고 조중동 수구 미디어권력의 지배블록을 다른 어떤 말로 더 적확히 묘사할 수 있겠는가? 현재 한국사회에 관찰되고 있는 ‘치안의 스테이트’
화요일 오후에 이 글을 대충 마무리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수업 등으로 미루다가 저녁 술자리에서 양문석 박사가 ‘그거 이미 순택이가 썼는데’라고 했습니다. 소재정도나 같겠지 싶어 봤는데, 진짜 제가 준비하고 있는 글과 문제의식이 거의 같습니다. 택의 내공에 감탄합니다. 하하, 이렇게 말하면 괜히 자화자찬이 되는 겁니까? 그래도 괜찮습니다. 모두가 예스라 하거나 침묵을 지킬 때, ‘아니요!’라고 정확하게 발언할 수 있는 용기 있는 권 기자 같은 저널리스트는 아무리 칭찬해도 지나치지 않아 보입니다. 맞습니다. 권 기자는 흔히 말하는 ‘황소의 눈알(bull's eye)’을 정확히 꿰뚫었습니다. 과녁을 제대로 맞추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괜히 길게
마르쿠제가 경고했었지 아마? 일차원적 사회는 일차원적인 사고를 강요하고, 후자는 다시 일차원적 인간을 낳는다고. 대단한 경구도 아니다. 사회/현실은 애당초 ‘중층 결정적’이고, 중요하다고 할 만한 사태의 진행은 근본적으로 복잡할 수 없으며, 따지고 보면 모든 인간사가 다소간 차이는 있지만 다면적이다. 따라서 제대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우리는 따지고 또 따져봐야 한다. 이리 보고 또 저리 봐야 할 것이며, 전면에 부각된 사실에 주목하면서도 배후에 은닉된 측면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현재 진행상황을 예리하게 따라잡으면서도, 지금까지의 궤적을 놓치지 말아야 하며, 미래 가능한 경로 예측의 노력도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과거의) 원인과 (현재의) 과정, 그리고 (미래의) 결과를 말 그대로 총체적
두 가지 인식적 오류의 정리가 필요하다. 첫 번째는 전체주의를 민주주의의 반대말로 오인하는 것이다. 둘을 모순적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개념적으로는 그러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실제 현실에 있어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내재적 증상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주의’의 우발적 예외 혹은 외부가 아닌, 정상적 논리 내부의 상황으로 존재해 왔다. 한국의 현대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컨대 박정희 독재가 언제 ‘민주’라는 말을 포기한 적이 있었으며, 자신이 하는 모든 (일방적이고 폭력적이며 독재적인) 정책들이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한 적이 있었던가? 대체 누가 민주주의를 말하는지, 비판적이고 성찰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막스 호르크하이머(M. Horkheimer)라는
프로듀서(PD)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연출하는 사람을 일컫는가? 모두가 맞다고 인정할 것이다. 우씨 초딩 같은 질문. 피디는 MBC 과 같은 드라마도 만들고, KBS 같은 오락물도 연출하지만, SBS 과 같은 교양 프로그램도 제작한다. 당근이지! 뭐야 너무나 당연한 말을 왜 자꾸 해대? 우리 상식을 자꾸 조롱할거야? 짜증나겠지만 조금만 참고 다음 물음에도 답해 보시라. 교양 프로그램을 맡은 피디들은 KBS 과 같은 자연 혹은 환경 다큐멘터리도 만들고, KBS 과 같은 역사 다큐멘터리도 연출할 수 있지만, MBC의 과 같은 시사 다큐멘터리도 맡을 수 있나?마지막 질문에 대해, 지금까지는 ‘물론이지’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그런데
KBS와 의 미필적 고의를 비판한다. ‘왜 나만 갖고 그래’ 라고 푸념할 수 있겠다. ‘남들도 그러지 않냐’고 항의하고 싶을 것이다. 어찌 하겠는가? 당신들은 자칭 ‘국가기간방송’사다. 공공연히 ‘국민을 위한 방송’이라 홍보하고, 수신료를 올리려고 온갖 꼼수를 다 쓰는, 명색이 한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아닌가? 그러하니 ‘정명’을 강요당하는 MBC에 비해 오히려 엄격한 비평의 잣대가 사용되어야 할 것이며, 사영방송인 SBS과는 비교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판단 기준이 적용되는 게 마땅하다. 이런 점에서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주 일요일 밤 시청자를 찾는 은 심각하게 문제다.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부실하다. 더욱 중대하고 위험한 점은, 이 특정 프로그램의
2년 전 노무현 정권 당시의 일이다. 2007년 6월 정연주 사장 시절에 KBS는 2,500원 지금의 수신료를 4,000원으로 인상하는 안을 발표했다. 그러기 위해 자체 여론조사를 실시했다고 했다. 또 이사회에서 진지하게 검토했으며 시청자위원회의 의견을 수렴한 안이라고 했다. 공청회 절차도 후다닥 대충 해치웠다. 방송위원회의 협조를 통해서였다. 현재는 야당으로 몰락한 민주당의 지원에 근거한 일종의 작전이었다. 그러면서 시민사회․운동진영에도 인상의 불가피성을 설득코자 했다. 몇 십 년째 동결되어 있는 수신료의 현실화가 가능토록 도와달라고 했다.그런데 본인이 속한 문화연대에서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절대적으로 부족한 시간 속에서도, 공론과 토론의 장을 통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 문제를 지적했다.
쪽팔리는 내 이야기다. KBS 시청자위원회 공모에 응했다가 또 떨어진 공공미디어연구소 이사장, 문화연대미디어문화센터소장, 한국언론정보학회이사, 편집인, 영상원 교수의 남사스러운 일이다. 노무현 정권, 정연주 사장 때는 왜 그랬는지 예선에서 떨어지고, 이번에는 본선까지 올라갔다는 데 또 떨어졌다. 새로 서류 제출하라고 해 혹시 이번에는 될까 싶었는데, 한 마디로 탈락이다. 허참 약 올리는 것인지 욕보이자는 것인지. 섭섭하기에 앞서 짜증이 확 난다. 남들한테 할 이야기 아니라 할지 모르지만, KBS 시청자위원 지원이 공공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 결과를 이렇게 알리는 것도 창피하지만 필요한 것 같다. 며칠 전 ‘미디어스’의 개인적으로 ‘택’이라 부르는 친한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선생님
참 답답할 때가 많다. 아무리 정리하고자 해도 잘 해소가 안 되는 경우다. 방송 심의의 문제가 그러하다. 심의의 개념을 제대로 규정하자고 주장해 왔다. 그럼으로써 사태를 명료하게 파악하고 또 해결의 실마리를 제대로 모색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개인적 소망을 이런 저런 기회를 통해 피력해 왔다. 이런 시도는 유감스럽게도 번번히 실패로 돌아가고, 별다른 울림의 효과를 내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는 방송 심의에 대한 지독한 오해의 상태에 있다. 심지어 운동진영, 비판매체, 진보학계의 경우에도 그러하다. 간단하게 말해서, 심의를 정치의 반대말로 이해하는 지극히 왜곡된 담론의 틀, 전도된 인식의 틀이 고착화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해결의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한다.사실 심의는 규범적인 동시에 현실적인 일종의 이
이제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그냥 DJ라는 말을 계속 쓰도록 한다. 안타까운 죽음이지만 그래서 격식 차리고 싶지는 않다. DJ를 단순히 MB과 같은 이니셜로 볼 수 없다. 설혹 그렇더라도 투여된 사회적 정서와 역사적 의식, 정치적 의미의 질감 및 크기는 완전히 차이난다. DJ는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이름이다. 사회가 만들어낸 그에 대한 각별한 애칭이다. 인간 김대중에게 덧붙여진 역사적 호명이고 정치적 인명이자 문화적 아호인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DJ는 개인 김대중의 죽음과 상관없이 현재로서 생생히 살아있고 또 앞으로도 상당 기간 살아남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김대중씨’라는 표현보다는 DJ라는 단어가 훨씬 더 친숙하고 편하다. DJ로서 가깝게, 대중적으로 다가온다.사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