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현실은 우리가 상상하는 세계보다 상냥하고 유쾌하다. 세상 곳곳에 히어로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평상시에 이들은 평범한 우리와 같다. 출근하기 위해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면 5분만 더, 하고 베개에 얼굴을 묻고 버티고,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씻고 먹고 출근 준비를 하여 버스 정류장으로 지하철역으로 뛰어간다. 거의 정시에 출근하여 의자에 앉자마자 모니터를 켜고 일하기 시작한다.12시까지 정신없이 일하고 나면 기다리던 점심시간. 점심 메뉴를 정하고 동료와 함께 맛점을 하러 간다. 아이들 이야기, 아내와 남편,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올해 여름은 일찍 시작되었고 내내 무덥다. 더운 것도 참을 수 없는데 습하기까지 하다. 6월부터 본격적으로 30도가 넘는 무더위가 시작되더니 폭우성 비가 쏟아졌다. 아침에도 점심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더위 때문에 지치고 고단하고 짜증이 났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고, 습도가 높아 옷이 물에 젖은 미역처럼 척척 달라붙었다. 이런 날이면 고민이 생긴다. 속옷 때문이다.이렇게 덥고 습한 날 브래지어를 착용하는 것은 형벌이다. 더운 여름 외출을 앞두면 옷장 앞에서 항상 고민한다. 입을 것인가, 말 것인가. 나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며칠 전까지 강원도에 있는 문학촌에 있었다. 문학촌은 인가와 떨어진 곳으로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는 외진 곳에 자리하고 있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읍내로 나가야 했다. 집필에 필요한 것과 먹는 것은 모두 문학촌에 있었기 때문에 별로 필요한 것은 없었으므로 마실 삼아 일부러 읍내에 나가 한 바퀴 돌아보고 오기도 했다.그날은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다. 빗소리와 어우러지는 풍경이 내내 시선을 창에 머물게 하였다. 결국 집필을 접고 다른 선생님들과 읍내에 나가 치킨에 가볍게 맥주 한잔하고 오기로 하고 읍내로 향했다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걷는 것, 산책 좋아하세요, 라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걷는 건 좋아하지 않는데 산책은 좋아한다고 말하면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는다. 어떻게 산책은 좋아하는데 걷는 걸 싫어할 수 있어요? 글쎄. 나도 그것이 아이러니하긴 하다. 오래 걷거나 힘들게 걸으면 아름다운 경치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먼저 생긴다. 이미 멀리 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피로감은 두려움으로 변한다. 체력은 바닥이고 걸어온 만큼 다시 걸어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면 막막해진다. 6월인데 벌써 낮에는 30도를 넘어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스마트한 세상에서 스마트 폰 사용은 기본이다. 스마트 폰 하나만 있으면 은행을 가지 않아도 은행 업무를 볼 수 있고, 필요한 물건이 있으면 주문해서 집으로 배송시킬 수 있고, 배가 고프면 음식점에 가지 않아도 배달시켜 맛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다. 스마트 폰 하나면 의식주를 해결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다. 스마트 폰으로 스케줄 관리도 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듣고 싶은 강의도 듣고, 책도 읽을 수 있다. 스마트 폰 하나면 슬기롭고 편리한 생활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단 ‘사용할 수 있을 때’라는 전제가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언니, 은희를 봤어. 우리 은희, 라는 전화 연락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유쾌하게 웃었다. 내 이야기인 줄 알았다. 후배가 나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다. 영화 이야기인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대화를 주고받는 중에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나의 그 시절과 너무나 닮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대화가 오고 가면서 영화 이야기이고 주인공 이름이 은희,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다른 은희에 대해 알게 된 순간이었고 또 다른 은희의 그 시절이 나의 그 시절과 다르지 않았다는 것에 왠지 모르게 가슴 한편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다른 시간에 사는 아이들이 있다. 코알라의 낮잠처럼 아주 더디게 흐르는 시간 속에 사는 아이들이 있다. 장애와 비장애 경계에 있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아이들. 그중 한 아이를 알고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지능은 아이에게서 더는 발달하지 않지만, 몸은 일반인과 같이 성장하는 아이였다. 바꿀 수 있다고, 바뀔 수 있다고 어리석은 생각을 했던 때도 있었다. 그래서 무리하게 아이에게 완력을 사용한 적도 있었다. 걱정하며 바라보던 시간이 있었다. 걱정했던 시간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내 어린 시절, 집이라는 공간은 항상 포화 상태로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할머니가 있었고, 어머니, 아버지가 있었고, 오빠와 언니가 있었고 삼촌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 시절에 맞게 가장 평범하고 전형적인 가족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1970년, 80년 대에는 3대가 같이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고, 이모나 고모, 삼촌 혹은 사촌 오빠까지 가족을 이루며 살았다. 집은 비좁았고 식사 준비를 하고 가족이 다 모여 앉아 먹는 데도 한참 걸렸다. 대가족이 별 탈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는 데에는 아버지의 권위와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다시 봄이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다. 나뭇가지마다 연하고 여린 초록 잎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생명력을 되찾고 되살아나는 봄이다. 사람들은 추운 겨울을 버티며 다시 꽃 피기를 기다리고 꽃은 기어코 응답한다. 그리고 기어코 기억도 다시 돌아온다. 봄이 누구에게나 아름답고 찬란한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봄이 겨울보다 춥고, 뼈마디까지 시리고 아플 정도로 혹독할 수도 있다.눈부시게 따뜻한 봄 햇볕의 은총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봄은, 봄의 햇살은 그들과 상관없는 생동감, 그들과 상관없는 찬란함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내가 사는 곳은 봄이 늦게 찾아오고 겨울이 빨리 오는 지역이라 다른 지역에서 꽃이 지고 나면 그제야 피기 시작한다. 계절 감각이 둔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어제 서울 나갈 일이 있었다. 차에서 보니 햇살의 빛깔과 질감이 달랐다. 살갗에 닿는 햇볕이 따뜻한 봄이었다. 봄은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이다. 나는 봄과 어울리는 단어를 떠올릴 때마다 기적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길가에 줄지어 서 있는 가로수를 보면 경이로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푸른 싹이 거북이 등딱지 같은 나무껍질을 뚫고 나오는 모습은 볼 때마다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예술활동증명’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예술인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다. 예술활동증명 진행단계는 이렇다. 신청 완료, 접수 완료, 행정검토, 위원회 검토, 완료 혹은 미완료 과정을 거친다.일단 신청하기 위해 서류를 작성해야 한다. 문학의 경우 일단 작품 발표한 시기별로 나누어 데뷔한 지 오래되지 않은 신예인지, 아니면 5년 이내 책을 출간한 작가인지, 아니면 최근 1년 동안 예술활동으로 얻은 수입이 120만 원 이상인지에 따라 자신이 해당하는 자격에 맞게 신청하면 된다. 신청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불과 몇십 년 전까지 상상만 했던 미래가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 적어도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던 미래였다. 인공지능 로봇이 노인의 말벗이 되고, 학교 수업이 비대면 화상 수업으로 대체되고, 아이들은 가상의 공간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며, 민간인도 우주로 여행할 수 있는 시대가 내 세대에 실현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상상할 뿐이었다.이 모든 것을 SF라고 생각했다. 공상과학소설이나 공상과학영화나 공상과학 만화에서만 볼 수 있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요즘 대화 중 많이 묻는 말은 ‘대통령 누구 뽑을 거야?’다. 어떤 이야기로 시작해도 이야기의 흐름은 대선으로 흘러간다. 물가가 많이 올랐어, 월급은 오르지 않고 세금만 올라, 내년에 우리 아이 고3이야, 어머니 요양병원 알아보아야 해, 라는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언제나 나오는 말은 대통령을 잘 뽑아야 한다는 말이다. 맥락도 없이 왕따 이야기로 시작되었든, 직장 문제로 시작되었든, 시부모 사이의 갈등으로 시작되었든 모든 이야기가 대선으로 귀결되는 것은 대통령 선거가 우리 생활과 모두 연결되어 있고 삶의 질을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뉴스를 통해 보는 세계는 세상이 이렇게 돌아가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기괴하다. 끊이지 않는 존속 범죄, 인간이기를 포기한 듯한 사건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차마 입에도 담기 힘든 범죄의 피해자들은 대부분 약자이다. 노인이거나 딸이거나 여성이다.지난해 여름, 꽃다운 나이 스물다섯 살로 생을 마감한 황예진 씨 사건이 보도되었다. 놀랍고 슬픈 일이었다. 교제중이던 남자와 다툼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남자가 황예진 씨를 폭행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보도였다.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했을 때 처음엔 놀랐고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작년 한 해 MBTI가 대유행하였다. MBTI는 개인, 사회, 인간관계에서 어떤 패턴을 보이는지 알려주고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고안된 성격유형지표이다. MBTI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MBTI 자격증을 취득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MBTI를 기반으로 상담을 해주는 기관도 생겼다.MBTI는 16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눠진다. 선호 경향에 따라 에너지 방향이 외향형에 속하는지 내향형에 속하는지, 인식 기능이 감각적으로 작용하는지 직관적으로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또 판단 기능이 사교형에 속하는지 감정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약속이 있어 종로에 갔다가 오랜만에 서점에 들렀다. 서점에 가면 의식처럼 문구 코너에서 볼펜을 사고 소설 코너에 가서 요즘 나온 소설을 둘러본다. 전후가 바뀌어도 서점에 가면 항상 하는 의식이다. 글을 쓰겠다는 다짐, 좋은 글을 재밌게 쓰겠다는 다짐을 부적처럼 가슴에 안고 오는 것이다.그날도 볼펜을 사고 소설을 둘러보았다.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베스트셀러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바뀌지 않고 그대로였고, 십 년도 넘은 책이 가판대에서 양장본으로 거듭 표지를 바꾸어 베스트셀러로 놓여 있었다. 항상 같네,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나는 인터넷 쇼핑몰에서 청바지를 산다. 39900원의 가격이 세일해서 32000원으로 내려가 있다. 요즘 유행하는 배기바지로 디자인도 예쁘고 색감도 좋다. 요즘 대부분 옷이 그렇듯 중국에서 제작해 가격도 착하다.청바지는 포장 상자에 깨끗한 비닐봉투에 넣어 포장된다. 꺼내서 확인하니 염료가 손에 묻어나고 질도 좋지 않다. 한철 입으면 그만일 것 같다. 세탁해서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며 포장 상자는 재활용으로 분리한다. 비닐봉투는 스티커를 제거하고 일반쓰레기로 분류하여 따로 모은다. 청바지를 여름에 네 번 입는다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2년 전 학원에서 강의를 할 때였다. 전 여자친구의 가족을 죽이고 여자친구를 감금 폭행을 하다 잡힌 스토킹 범죄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스토킹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선 가족에게 알려야 하고, 혼자 다니지 말아야 하고, 호신용품은 꼭 가지고 다녀야 하고, 무엇보다 경찰에 알려야 해, 라는 의견이 오고 갔다.A가 말없이 조용히 듣고 있더니 툭, 한 마디 던졌다. 다 소용없어.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A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전혀 모르는 남자한테, 짐작도 되지 않는 남자한테 스토킹을 당하고 있었다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집 앞에 천이 있다. 천변 길을 따라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어 지역 주민뿐만 아니라 자전거 동호회 사람들도 많이 이용한다. 서울의 천변 길과 달리 집 앞 천변은 산책로만 만들어졌을 뿐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풍경이 살아있는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길이다. 사계절을 다 느낄 수 있는 매력적인 길이고, 날씨의 농도를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길이다.새벽의 알싸한 공기와 아침의 청명한 하늘과 부스스 부서지는 점심 햇살, 저녁이면 산 너머로 번지는 진홍색 노을 사이로 떠오르는 달과 남청색 주단을 깔아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독서 낭독모임에 참여했었다. 각자 일주일 동안 읽은 책 중에서 기억에 남는 구절과 좋았던 문장 등을 내용과 함께 이야기하는 모임이었다. 내가 가지고 갔던 책은 구병모의 이었다.실험공동주택에 입주한 주민들의 이야기였다. 아파트에 입주하는 조건은 자녀를 셋 갖는 것으로, 저출산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는 것에 대한 정부의 실험적 대책으로 세워진 아파트였다. 열두 세대에 네 세대가 먼저 입주하였다. 책에선 여성의 돌봄 노동의 문제와 공동육아의 현실적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있었다.책을 읽는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