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인경 / 박선주 지음, 지콜론북(2013)멋진 것과 멋지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데에는 감각이 동원된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감각은 각각 다르고, 그렇기에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하는 것은 각기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누군가는 단추를 세 개 이상 풀어 가슴근육을 보여주고, 그 위에 체인 목걸이를 거는 것을 멋스럽다고 느낀다. 나는 그 모습이 왠지 싫다. 왜 거부감이 드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이건 감각의 문제인 것 같다. 이성이 개입할 때도 있다. 심야에 한강의 다리를 건널 때 알알이 비즈를 수놓은 거 같은 반짝임과 화려함에 홀리다가도, 이런 야경을 지탱하기 위해 쓰이는 전기를 생각한다. 수도권에 전기를 셔틀하기 위해 삶의 터전이 짓밟히고 있는 비수도권의 사람들
어떤 경험들은 사람을 그 경험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게 할 정도로 강렬하다. 그런 강렬한 경험은 거창하지만은 않다. 우리 일상 속에도 빈번하게 일어난다. 첫 음주를 통한 첫 알콜섭취나 첫 흡연으로 니코틴에 노출되는 경험 등이 그렇다. 개인적으로 그런 경험들 중 카페인 즉 커피를 마신 것이 가장 최근 인생을 뒤바꾼 경험이었다. 적당히 즐기게 된 알콜과 전혀 즐길 수 없음을 알게 된 니코틴에 비해 내게 카페인은 단순히 기호식품을 넘어서 이제는 생활의 필수품이 되었다. 맛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나의 뇌는 이제 그저 카페인이라면 좋다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실 음료로서의 커피는 한참 어렸을 적에 이미 수차례 접했었다. 하지만 카페인은 몸에 나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 의도적으로 커피를 멀리했고 웰빙이
사회물리학이라는 말은 낯선 느낌을 자아낸다. 물리학이라면 다른 자연과학이 그러하듯이 물질 세계를 대상으로 각종 크고 작은 대상과 자연현상의 원리를 연구하고 법칙을 찾아내는 학문일진 데 앞에 사회라는 말이 붙으니 당혹감을 느끼는 것도 놀랄 것 없다. 혹자는 그 단어에 함축되어 있을 지도 모를 환원주의적 혹은 기계론적 접근에 불편함이나 반감이 들지도 모른다. 사실 사회나 인간에 대한 자연과학적 접근이나 설명은 많은 경우 이러한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으며 이는 과학의 속성상 어느 정도 불가피한 면이 있기도 하다. 얼마 전 유행했던 사회생물학에 기반한 통섭 역시 그러한 비판의 예외가 아니었다. 이상과 같은 감정 혹은 선입견 때문에 사회물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인간과 사회를 설명한다는 소개에 생소함 그리고 약간
“우리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시간 말야.”“응.” “우주의 시간 차원에서 생각하면 ‘무(無)’와 다름없겠지?”“무(無)?”“그게, 우주에서 지구가 탄생한 게 약 46억 년 전이잖아?(...)우리가 태어난 것도 ‘약 46억 년 전’이고 우리가 죽는 것도 ‘약 46억 년 전’이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거잖아.”- 마스다 미리, 《밤하늘 아래》(애니북스, 2013), 141쪽 우리에게는 채 100년도 못 되는 시간만이 허락되어 있다. 46억 년이라는 지구의 나이는 태양과 우주의 나이에 비해서 적은 편인데도, 그 지구의 나이에 비해서도 우리의 시간은 더없이 짧다. 한순간, 찰나, 눈 깜짝할 사이 등등 짧은 순간을 비유하는 어떤 말을 붙여도 모자랄 판이다. 이렇게 우주를
작가 주: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이 책을 비롯한 이 책의 자매편 , 그리고 이후로도 계속된 작법서 시리즈인 , 을 번역하고 싶어 2013년 초반, 여기저기 책과 기획서를 가지고 다니며 타진해 보았다. 그러나 내 행동력 부족, 인맥 결여, 능력 부족 등의 이유로 불발되고 말았다. 다행히 는 북바이북에서 일본문화 전문가인 선정우 씨에 의해, 그 당시 번역이 진행되고 있었고, 무사히 출판되었다. 2009년, 나는 이 책을 원판으로 구입해 읽었고, 이 책에 포함되어 있는 워크시트를 바탕으로 온라인 워크숍을 진행한 적도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책에는 몇 가지 보안점과 부족한 점이 분명히 있으며
한국은 여러 가지로 차별이 많은 나라이지만, ‘나는 차별을 한다’거나 ‘나는 차별에 찬성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찾을 수 없다. 차별의 피해자라는 호소도 많지만, 그것이 꼭 모두 차별의 피해가 맞는지 들여다보면 또 아리송하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사람들은 차별이라는 말이 등장했을 때 ‘그 특정 기준이 누군가에겐 차별이 되지 않을지, 형평성을 고려했을 때 적절한지’를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그건 차별이 아닐까’라는 말은 ‘너는 나쁜 놈이 아니냐’는 공격적 의미만 부각된다. 그래서 듣는 쪽도 발끈하며 일단 차별이 아니라고 답하기 마련이다.이런 인식 하에서 내가 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구분이어야만 한다. 차별이라고 인정하면 그것은 ‘나는 나쁜 놈이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기 도덕성만의 문제
작가 주: 범은하활자박멸운동위원회의 외계인, 파흐레느헤이트451인들은 인류가 가진 멋진 문화인 영화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영화와 실제를 구분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 책 를 소개하면서, 영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 보고서를 읽을 지구인에게는 약간의 보론이 필요하다 판단해 주석을 단다.군인이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나는 007 제임스 본드의 영화를 어릴 때부터 접해왔고, 약간은 ‘유치한’ 특수장치나 플롯이 나이를 먹을수록 어색해져갔다. 원작 소설은 영화와 분위기가 다르다는 말은 들었어도 풀리지 않던 오해를, 원작소설의 일본 번역판 제2탄 를 읽었을 때 풀 수 있었다. 영화로도 봤던 작품이었고, 영화 속 제프리 홀더가 연기한 부
“(...)언젠가부터 내가 들이마시는 시대의 공기는 몹시 탁해졌고 또 희박해졌다. 더 이상 사람들은 긍정적이지도 낙관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않는다. 한편, 한때 과거의 일 혹은 먼 나라의 일로만 느껴졌던 경제적, 정치적 위협들이 속속 현실화되고 있다. 가장 절망스러운 것은, 내가 느끼는 시대의 괴로움이 감동적이고 우아한 일급의 비극이 아니라 삼류 막장 드라마에 가까운 것 같다는 것이다. 사실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을 정말로 좌절하게 하는 것은 고통의 강도보다는 고통의 내용, 그것의 텅 비어 있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가진 문제의 대부분은 어느 다른 시대의, 혹은 어느 다른 나라의 어설픈 복사본이거나 덜떨어진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도착할 결말이 막장 드라마의
무라카미 하루키의 달리기는 그의 소설만큼은 아니지만 꽤 유명하다. 그는 매일 10킬로미터를 달리고 마라톤 풀코스도 수십 차례 완주했다. 달리기에 관한 책을 쓰기도 했고, 묘비명에 ‘작가 겸 러너, 적어도 끝까지 걷지는 않았다’라고 써달라고 할 정도로 달리기에 대한 애착이 깊다. 임마누엘 칸트의 산책은 그의 철학보다 훨씬 유명하다.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읊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지만, 칸트가 산책하는 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시간을 알았다는 신화는 진실로 여겨진다. 하루키는 왜 달렸고, 칸트는 왜 산책을 했을까. 물론 건강도 중요한 이유겠지만, 이건 일종의 의식(儀式)이다. 삶의 리듬을 유지하고 무언가 해내기 위해 준비하는 과정, 이런 일상의 반복적인 행동 패턴을 ‘리추얼’이라고 부른다. 이 책은 작가
, 빌리 엔 / 오르바르 뢰프그렌 지음, 신선해 옮김, 출판지식너머(2013) 영화 의 주인공 월터는 공상을 즐기는 인물이다. 폭발하는 건물에서 좋아하는 여자의 강아지를 구하는 상상을 하다 기차를 놓치고, 짝사랑 하는 직장 동료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돌연 이탈리아 악센트를 가진 산악인이 돼 작업 거는 상상을 하며, 짜증나는 상사와 어벤져스 마냥 도시를 누비며 격투하는 상상을 한다. 하지만 월터의 내면에서 그토록 격렬한 작용이 일어나는 것과 달리 주변사람들은 월터가 그저 ‘멍 때리는’ 줄 알 뿐이다. 은 문화 미디어 연구학자 빌리 엔과 유럽 인류학 교수 오르바르 뢰프
모든 아티스트는 픽업아티스트다.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모든 아티스트는 픽업아티스트지만 모든 픽업아티스트가 아티스트는 아니라는 말이다. 직업으로서의 ‘픽업아티스트’라면 두 말 할 것도 없다. 혹자는 그것을 창조 경제라고 부를지도 모르겠지만, 고작해야 그들은 자기 자신의 밥벌이를 창조할 뿐이다.예술의 역사는 곧 여성을 유혹하기 위한 남성들의 ‘창조적’ 노력의 역사다. 여자들의 호감을 사기 위한 고군분투가 예술사를 만들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고군분투의 결과물이라고 해야겠지만. 아트와 ‘픽업아트’는 본디 하나였다. 미안하다. 나는 지금 여성을 주체가 아닌 대상의 자리에 놓고 있다. 하지만 역사가 그따위인 게 내 잘못은 아니지 않은가? 인간 역사를 통틀어 공개적으로 과시된 미술들의 거의
태어나 줄곧 강남에 살았지만, 소위 강남의 버블을 경험해본 적이 없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강남 아파트를 중심으로 한 대한민국의 경제의 흥과 계층 이동의 마지막 광란의 파티를 옆에서 지켜보는 초라한 강남구민 중 하나였다. 나는 어린 시절 내내, 늘 궁금했다. 왜 사람들은 내가 사는, 그리고 내 눈에는 별것 아닌 ‘강남’을 외치는지, 그런데 나는 왜 ‘강남’ 뒷골목에서 월세와 전세를 전전하며 살아야 하는지, 어째서 내 친구들은 늘 개포동이나 대치동으로 이사를 가거나, 강북에서 이사를 왔거나, 나보다 다들 잘 살았거나, 왜 그들의 부모는 양옥주택을 허물고 다세대 가구를 짓는지. 나는 내가 왜 강남에서 태어나 이렇게 살고 있는지를 설명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당연히 한 번쯤은 우리 부모님에게 기
보통 사람들은 갖고 있는 것을 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주 동떨어져 있는 것 때문에 애끓지도 않는다. 손에 잡힐 듯 말 듯 한 것, 손에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것, 다른 이의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이 사람을 미치게 만든다. 그렇게 미치게 만드는 것이 사람일 때, 집착은 아주 위험하다.흔히 볼 수 있는 사람에 대한 집착은, 연애 대상에게 쏟는 과도한 관심과 간섭이다. 방금 이 문장을 쓰면서 ‘관심과 간섭’ 사이에 ‘애정’이라는 단어를 넣을까 고민했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집착하는 입장에서는 애정이겠지만 대상화된 상대방이나 제삼자가 보기엔 아닐 수도 있는 문제니까. 그렇지만 이 글에서는 집착과 사랑을 함께 다룰 것이다. 나는 집착과 사랑을 분별하기가 어려운, 어리석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일본 탐미주의
2013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크리스마스와 관련된 책 한권을 읽게 되었다. 발행날짜가 2013년 12월 24일인 이 책의 제목은 (원제는 “Behold the Man”. 마이클 무어콕 지음, 최용준 옮김, 시공사). 요한 복음서 19장 5절에서 예수를 십자가형에 처한 로마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폰티우스 필라투스)가 로마군인에 의해 고난을 겪는 예수를 가리켜 했던 말이다. 빌라도가 한 이 말은 라틴어로 “에케 호모”(Ecce Homo)인데 이것을 제목으로 삼은 성화(聖畵)가 많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다. 그 많은 에케 호모들 중에는 할머니가 함부로 손을 대어 엉망으로 훼손된, 그래서 전 세계 사람들에게 화제가 된 스페인 보르하 시의 산투아리오 데 미제리코르디아 성당의 에케 호모도 있다.니체
《다른 길이 있다》(한겨레출판)는 김두식 교수가 인터뷰어로 나서서 서른 명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모아 수록한 인터뷰집이다. 정답대로 살아가기를 권하는 모범생들의 사회 속에서 다른 길을 찾는 시도는 지속적으로 있어 왔고, 대체로 ‘다른 길로 가보자’는 맥락에서였다. 사회나 기성세대가 제시하는 모범생으로서의 길 이외의 다른 길이 있고, 그 삶도 얼마든지 멋있으니, 다른 길을 꿈꾸고, 시도하고, 도전하자는 메시지, 혹은 입시위주의 교육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다른 길을 안내하고 독려하는 메시지였다. 그런 것을 예상하다 《다른 길이 있다》를 읽으면 당황스러울 것이다. 나는 이게 한겨레 토요일판에 연재되던 때 각기 따로 읽었음에도, 같은 인터뷰를 책에서 두 번째 읽고도 처음처럼 당황스러웠다. 이것은 ‘내가 가지
작가 주: 행성 의 외계인들에게 있어, 활자는 상형문자의 일종이라고 판단하는 모양인지 만화나 활자나 같다고 생각한다. 나는 만화의 오랜 팬이자 일종의 동업자 의식을 가지고 있고, 만화와 소설은 서로 독자적인 길을 걸으면서도 그 길은 많은 부분 겹쳐있다고 느끼고 있다. 그 중에서도 흔히 말하는 ‘문학’의 영역에 당당한 걸음으로 행진한 작품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만화, 그중에서도 4컷 만화라는 장르는 오랜 세월동안 작은 아이디어가 기승전결을 밟아 완결되는 소우주였다. 이시이 히사이치라는 거장이 빅뱅을 일으켜 소우주를 하나로 모았다. 그는 4컷 만화를 네 칸을 넘어 연속적으로 이어져 전체가 기승전결이 되게 만들었다. 4컷 만화는 끊임없이 이어지며 우주를 담을 수 있게 되었다.
지난 3월 후쿠시마 원전 사태가 2년을 맞이할 즈음, 1년을 맞이할 때보다는 적었지만 마찬가지로 여러 책이 나와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잊혀 가던 기억을 되살렸다. 시차 때문인지 사태 자체보다는 사태 이후를 전망하고 성찰하는 책이 중심이었고, ‘그날’은 ‘그곳’처럼 사람이 찾지 않는 희미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곳’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삶에 대한 의지를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음을 전해준 한 권의 책이 때마침 도착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오오타 야스스케가 기록한 이다.‘사태’ 이후 경계구역으로 지정된 원전 반경 20킬로미터 이내 지역에서는 사람을 만날 수 없다. 사람은 떠났고, 동물은 남겨졌다. 목줄을 풀지 못해 제 집에서 그대로 굶어죽은 개, 왜 죽어 가는지도 알지
‘2013 올해의 책’을 선정해달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는 그만 난감해지고 말았다. 무엇을 가리켜 ‘올해의 책’이라고 불러야 할지가 너무나 모호했기 때문이다. 2013년에 출간된 신간들 중에 한 권을 고르면 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한국 내에서 출간된 것으로 한정해야 하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무엇이 기준이 되어야 할까. 판매량? 내용의 수준? 시의성? 모든 신간을 읽어본 것이 아닌 나로서는 딱히 어느 한 가지 척도를 당당하게 제시할 수도 없었다.때문에 나는 결국 어떤 타협의 지점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설마 이러한 선정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 나 혼자만은 아닐 테니, 어느 정도의 주관이 개입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다 싶은 판단도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비약을 감수
올해의 책이라……. 저는 독서가 부족해 항상 고민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대학도 코스모스 졸업해서 취미에 쓸 시간이 생겼고, 뿐만 아니라 여러 프로젝트에 (지금은 ‘파토’났지만) 참가하면서 읽어야할 참고자료도 많았습니다. 덕분에 올해는 평소보다는 조금 많이 읽은 한해였습니다. 달리 말하면 당장 돈도 없고, 미래도 불투명한 반백수와 백수 신분인지라, 그나마 있는 남은 시간이라도, 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행위로 채우자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둔 책을 읽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선정하려니 무엇을 골라야 하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외서도 자주 읽습니다. 외서가, 올해의 책으로 꼽을 만한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책 중에 꽤나 끼어 있어서, 선뜻 꼽기
지그문트 바우만, 정일준 역, , 새물결, 20132013년에 발간된 인문·사회 신간들을 검색하고 있노라면, 더 할 이야기가 없다는 말을 부재로 표현한다는 생각이 든다. 정확하게 말하면 할 이야기는 이미 다 했는데, 무엇에도 반응하지 않는 현실에 힘을 잃었다는 것이 옳으리라. 우리의 생활환경을 바꾸어버린 신자유주의/세계화 체제에 대한 책은 많이 나왔다. 시장의 자유와 연계한 승자 독식 이념이 공동체 전체를 어떻게 힘겨운 삶으로 이끄는지도 제시된 바 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어떤 움직임이 보이는 것도 아니다. 힘들다는 푸념만 여기저기서 들릴 뿐이다.상황이 이러니 잠시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우리를 이런 곤경에 빠지게 하는 요인 중 하나는 도덕적 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