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휴대전화에서 새로운 소식이 전송되었다는 알림음이 울린다. 오늘의 운세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확인한다. 오늘의 운세 ‘당신은 소멸하는 중입니다. ’나는 거북이가 되어가는 중이다. 사람으로 태어났지만, 후천적 노력으로 거북이 목을 가지게 되었다. 이건 유행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핫한 인체변형 템이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누구나 유행에 동참할 수 있으며 아주 공평하게 변이는 작용한다. 인간이라면 유행을 따르는 건 숙명, 나도 숙명을 피해 갈 수는 없다.21세기를 살아가고 있다면 거북이 목으로 진화는 필연적이다.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세상의 모든 정원에 꽃이 필 때면 나는 너를 생각한다. 그 시절 따뜻하고 상냥했던 너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지난밤, 너는 앵두나무 밑에 서 있었다. 하얀 꽃으로 덮인 앵두나무 아래 서서 미소 짓고 있었다. 꿈이라는 걸 알았는데도 나는 너에게 선뜻 다가가지 못했다. ‘우린 이미 헤어졌는데’라고 생각했을 뿐인데 머릿속에서 너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내 곁에 있었는데.’ 나는 어느새 작고 약한 아이가 되어 너를 마주 보고 있었다.너는 그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는 앵두나무가 되어버린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2023년 5월 1일, 봄 햇살이 촘촘히 내리쬐는 날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날은 없을 정도로 햇살이 좋은 날이었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니 아이들이 자기 몸만 한 가방을 메고 줄지어 학교에 가고 있었다. 뜻깊은 기념일이 두 개나 있는 날, 근로자의 날이면서 어린이해방선언 100주년이 되는 날이었다.광화문에서 어린이해방선언 100주년을 기념해 행사가 있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가고 나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광화문으로 향했다. 월요일 오전이었는데 버스는 광화문으로 갈 수 없는 것 같았다. 크고 작은 행사와 집회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광화문에서 약속이 있었다. 아침에 일기 예보를 확인하니 여름 날씨라고 했다. 여름이라고 하여도 봄이니까, 생각하며 봄과 여름의 중간쯤에 해당하는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햇살도, 바람도 기분 좋게 살랑거렸다.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길에 초록색으로 물든 나뭇잎이 출렁거렸다. 버스 안에서 밖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일은 즐거운 일 중 하나였다.길엔 이제 막 대학생이 된 것 같은 풋풋한 모습의 젊은이들이 있었다. 한껏 멋을 내고 학교에 가는 대학생이 내 아들도, 내 딸도 아닌데 귀엽고 예뻐 보였다. 마스크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4월, 꽃 피는 봄이다. 담장을 넘어 길게 늘어진 노란 개나리, 담장 너머의 흰 목련, 길을 따라 물든 연분홍 벚꽃 그리고 진달래, 조팝나무꽃이 줄지어 길에 피었다. 세상이 이토록 알록달록 아름다울 수 없다. 어디 한군데 빠짐없이 속속들이 봄, 봄이다.와아, 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이번 봄은 유달리 형형색색이다. 어느 길이고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 동네 입구부터 늘어선 벚꽃은 이미 만개했다. 가던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빛 조각을 얇게 베어 나뭇가지에 붙여놓은 것처럼, 햇빛을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대여섯 살 무렵이었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던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동네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놀라운 일이었다는 건 기억나는데 무엇 때문이었는지, 어떤 사건이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이유를 생각해보니 동네를 들썩이게 했던 사건은 너무도 금세 없었던 일처럼 꼬리를 감춰버렸기 때문이었다. 마치 골목에서 울려 퍼지던 뻥튀기 아저씨의 뻥이요, 처럼 뻥 같았다.고막이 찢어질 것처럼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고 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거짓말처럼 구수한 탄내만 남기고 조용히 사라져 버리는 뻥이요. 동네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대멸종을 ‘대멸망’이라고 읽는다. 예언자가 아니어도 인류의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다. 인류는 곧 멸망할 것처럼 보인다. 폭발적으로 늘어난 인간이 지구를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장난감처럼 쓰고 있다. 먹고, 마시고, 입고, 즐기고, 버리고, 망가뜨린다. 이미 지구 곳곳에서 대멸종의 징조를 보인다.대멸종은 대멸망과 끝이 맞닿아 있다. 대멸종이 시작되면 인류의 시계가 멈추게 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대멸종과 대멸망을 앞두고 있는 인류치고는 너무도 태연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전화벨이 울려요.’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모르는 사람이면, 나와 관계없는 사람이라면 받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아는 사람’이다. ‘아는 사람’, 혹은 ‘알지도 모르는 사람.’ 친구다. 선배다. 거래처 사람이다. 손에서 땀이 나기 시작한다. 망설이는 사이에 전화를 끊기고 부재중 표시가 뜬다. 다시 고민이 시작된다. 전화해야 하나, 문자를 남겨야 하나? 뭐 하나 쉬운 게 없다. 나는 콜포비아인가?누군가와 말하는 게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될 줄 몰랐다. 만나지 않고, 전화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그게 무엇이 되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나이가 들고 있다. 허리를 잠깐만 구부리고 일해도 허리가 아파서 펼 수도 구부릴 수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무거운 것을 들면 여지없이 다리까지 아프고 저려 몇 날 며칠을 고생한다. 소화력도 예전 같지 않은 나이가 되어 조금만 많이 먹어도 탈이 난다. 내 나이에도 활기차게 날아다니며 사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고스란히 나이를 느끼며 살고 있다. 약골로 태어났고 십 대에서 이십 대, 삼십 대로 넘어가면서 건강해지려고 노력하며 몸을 아끼지 않은 탓이 클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이가 들어 좋다.이십 대에 책을 읽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고요하다. 창으로 드는 햇볕이 창가에 머물러 있던 한기를 중화시키는 아침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잔을 들고 주방 창가에 놓인 뮤렌베키아 아실라리스와 눈을 맞춘다. 요즘 들어 줄기와 이파리가 갈색으로 변하고 버석해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물을 주고 해가 드는 창가에 놓아주어도 버석거리는 것은 마찬가지였다.아실라리스와 눈을 맞추고 나면 거실 장식장에 놓인 취설송과 커피나무 상태를 확인한다. 현관에 있는 스킨답서스는 외출할 때 외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는다. 취설송은 이번 여름에 집에 들였다. 물을 많이 주지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tvN 은 해외로 입양된 개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1회를 끝까지 보지 못했다. 너무 많이 울어서 가슴에 통증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끝까지 본다고 해도 두 번은 보지 못할 프로그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볼 자신이 없었다. 방송 전부터 이효리를 중심으로 해외로 입양된 개들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문은 들었다. 사실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거리에 유기된 개들이 구조되었지만 새로운 가족을 찾지 못하고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면 반려견과 함께 생활하는 사람으로서 항상 미안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겨울이 유독 춥고 길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동화 작가 모임이 있었다. 연말이기도 하고 오랜 시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생존을 확인할 겸 얼굴 보고 밥을 먹자는 의견이 있었다. 열 명의 작가가 모여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는 소박한 모임이었다. 코로나19로 인해서 모임을 할 수 없어서 새로운 사람이 들어와도 인사를 나눌 일이 없었다. 몇년 만에 얼굴을 보며 밥 먹고 이야기를 나누며 작가들은 행복해 보였다.작가는 외롭고 고독한 직업이다. 나 혼자구나, 나 혼자만 글을 쓰고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책상에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우리 아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친구와 후배를 만나면 딸, 아들을 말할 때 생각 없이 사는 아이라고 걱정하며 말하는 것을 자주 본다. “도대체 하고 싶은 게 없어. 뭐가 되고 싶은 것도 없고, 재밌는 것도 없어.” 친구는 답답해 죽겠다며 한숨을 내쉬었다.그럼 나는 한숨을 쉬는 친구에게 항상 하는 말이 있다. “꼭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해? 그 나이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겠니. 딱히 재밌는 것도 없을 텐데.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더 하지 않지. 내버려 둬. 우린 하고 싶다고 해서 그대로 되었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김장철이 되면 몸이 안다. 김장 준비를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뼈마디가 욱신거리고 아고고고, 절로 앓는 소리가 난다. 김장 증후군이다.매해 김장은 어머니를 주축으로 나와 언니가 보조를 맡는다. 김장은 하는 날도 일이 많지만 하기 전부터 준비해야 할 것도 많다. 시장을 다니며 김장 재료를 준비하는 일은 어머니와 나의 몫이다. 어머니가 김장에 필요한 재료 리스트를 뽑아 필요한 양을 정하면 나는 일주일 동안 시장을 같이 다닌다. 김장에 필요한 고춧가루는 이미 여름이 사서 말린 후 곱게 빻아 놓은 상태고, 새우젓은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나는 소설을 쓰고, 동화를 쓰는 작가다. 공모전에 당선되어 며칠 전 당선 소감을 쓰게 되었다. 당선 소감 쓰는 기간은 정해져 있었고, 그 사이 나라에 큰 슬픔이 있었다. 소감문 쓰는 것을 미루다 마지막 날에 써서 보냈다. 행복하고, 기쁘다고 당선 소감문을 쓸 수 없었다. 나는 동화 작가로 아이들이 안전하게 커가는 것을 지켜볼 의무가 있는 사람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이태원 좁은 골목에서 많은 사람이 죽는 참사가 있었다. 일요일 새벽에 우연히 켠 핸드폰을 통해 아주 큰 사고가 있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때까지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확실히 2022년을 사는 아이들은 우리와 다르다. 꿈이 뭐야, 앞으로 뭘 하고 싶어, 라고 물으니 많은 아이가 유튜버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그중 한 아이는 내년에 유튜브 채널을 만들기 위해 친구들과 계획 중이라고 말했다. 하고 싶은 방송이 있는데 아이디어를 내고 계획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구체적으로 말했다.많은 사람이 유튜브를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줄 알고 있었지만,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 알고 싶어 물었다. 드라마를 시청하기 위해, 음악을 듣기 위해, 정보를 찾기 위해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어른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이는 몇 살일까?만 열여덟이 되면 어른이 되어 살던 곳을 떠나야 하는 청소년들이 있다. 이제 겨우 교복을 벗었을 뿐인데 독립을 해야 한다. 부모가 없거나 집안 환경상 양육이 어려워 아동복지시설에 맡겨진 아이들로 원가정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만 18세를 맞은 아이들이다. 이들은 자립준비청년(보호종료아동)으로 만 18세 이후 보호종료 되어 사회로 나가게 된다. 어른이 되는 연습 과정도 없이 세상에 홀로 던져져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열여덟 어른은 자신의 보호자이며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도서관을 품은 마을을 보면 마음이 따뜻해진다. 마을 어귀에서 도서관을 발견하면 보물 지도를 손에 쥐고 있다 보물을 발견한 것처럼 가슴이 뛰고 감동으로 뭉클해진다. 내가 사는 동네에도 도서관이 있다. 운 좋게도 집 바로 옆에 있다. 집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는 것은 행운이다. 언제든 책을 찾아 나설 수 있고, 언제든 궁금한 것을 해결할 수 있다. 주말에 도서관에서 글을 쓸 때가 있다. 작고 아담한 도서관이지만 조용한 곳에 있어 책을 읽고, 글을 쓰기에 안성맞춤이다.아침을 먹고 노트북을 챙겨 도서관으로 가는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오랜만에 연극을 보러 갔다가 그곳에서 소설가를 만났다. 직장을 다니며 소설을 쓰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소설가의 첫 마디를 듣는 순간 어깨와 등이 아팠다. 그 일이 얼마나 고독하고 힘든 일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직장 다니며 소설을 쓰고 있다는 소설가는 새벽에 일어나 6시부터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고 했다. 책상 앞에 앉아 어제 쓰던 글을 되새김질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소설가의 등을 쓸어내렸다.나도 얼마 전까지 직장을 다니며 글을 썼다. 하루 중 글을 쓸 수 있는 시간은 아침
[미디어스=소설가 김은희] 어떻게 하면 다정한 사람이 될 수 있나요, 라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한 여자가 있었다. 그때 나는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가당찮은 대답을 성의껏 했을 것이다. 대답은 기억나지 않지만 되물었던 질문은 기억한다. 그런데 그걸 왜 저한테 묻나요? 제가 다정해 보이나요? 여자가 고개를 끄떡이더니 대답했다. 나도 다정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여자가 생각하기에 나는 다정한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여자와의 첫 만남을 기억한다. 소설창작 수업에서였다. 긴장한 듯 입술을 살짝 말아 물고 오른손 집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