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기관의 수사 결과 발표는 사건의 종지부 찍기가 아니라 화룡점정이다. 발표 내용이 피의사실 공표죄와 국민 알권리 사이에서 어떻게 경합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형식상 아무리 피의사실로서의 자격밖에 없더라도 대법원 판결과 다름없는 가치로 올라서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해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정한다. 설령 피의사실이 재판에서 뒤집어지더라도 이데올로기적 단죄가 제자리로 복원되지는 않는다. 수사기관이든 언론이든 또다른 사건에 매달려 같은 행태를 되풀이할 뿐이다. 정정훈 변호사는 이와 관련해 “법원 판결에는 칼 맞은 이후 갑옷을 내주는 때늦음이 있다”고 표현했다. (‘칼’의 팩트를 견제하는 ‘펜’의 팩트를!)대검찰청이 오늘(12일) 오후 3시 ‘박연차 게이트’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까지 내몰
신문에서 가장 압축적인 표현양식은 뭘까? 스트레이트 기사나 사설은 저널리즘이 만들어낸 압축적 표현의 결정체다. 특히 스트레이트 기사는 신문이라는 매체의 발달사와 궤를 같이한다. ‘사실’(만)을 가장 정확하고 효율적으로 재현하기 위한, 좀 더 정확하게는 독자와 사회가 그렇게 믿도록 신화화한 ‘특화된’ 형식이자, 신문 기사의 가장 ‘보편적’ 형식이다. 만평 또한 매우 압축적이다. 손바닥보다 좁은 지면 위에 당일의 핵심의제를 ‘촌철살인’한다. 다만 스트레이트 기사가 다분히 공학적 결과물이라면 만평은 작가의 직관과 창의력에 따라 결과가 판이해지는 창작물이라는 차이가 있다.그러나 스트레이트 기사나 만평보다 한 수 위의 표현양식이 있으니, 바로 ‘정정보도’다. 정정보도가 압축적인 것은 신문의 자기방어 기제가 극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미디어위)라는 국회 내 사회적 논의기구가 있다. 지난 3월 국회에서 여야 합의로 구성돼 100일간의 활동에 들어갔다. 탄생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언론노조의 두 차례 총파업과 시민들의 여의도 촛불집회, 국회 안에서의 몸싸움 등이 먼저 있었다. 혹한을 후끈 달아오르게 했던 건 한나라당이 강행처리를 시도한 이른바 ‘미디어 관련법’들이다. 여러 법안에 걸쳐 있는 쟁점을 간추려보면, 대기업과 신문의 지상파 및 종합편성채널 진입 허용 여부로 좁혀진다. 한국사회 여론다양성의 식생을 좌우할 결정적인 내용이다. 미디어위 위원들은 국회라는 정파적 의사결정 구조의 한계를 극복하고 이들 법안에 대한 국민의견을 수렴해 합의안을 도출하라는 무거운 소명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
그의 생전에 그에게 결코 ‘동의’하지 않았던 몇 사람이 어울려 노래방 기계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그의 영결식이 치러지고 난 늦은 밤이었다. 노래는 내남없이 구슬펐다. 낮에 TV 생중계를 보거나 서울광장에 서서 한소끔 눈물을 몰래 훔친 것이, 일주일 내내 머리가 멍하게 아팠던 것이, 그 순간만큼은 쑥스럽거나, 이물스럽지 않았다. 그의 이념과 정책에 동의하지 않은 것과 그의 죽음에 연민하는 것은 모순돼 보이지 않았다. “꽃잎처럼 흘러 흘러 그대 잘 가라~” 나는 김광석의 ‘부치지 않은 편지’를 불렀다.노래를 마칠 무렵, 그의 죽음과 관련해 글을 몇 편 쓰고도 정작 그이에 대해 직접 언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새삼스런 깨달음이었다. 안구 건조증이라도 걸린 게 아닐까 은근히 걱
주류 언론이 자살을 다루는 방식은 대상과 성격에 따라 갈린다. 이름 없는 사람이 지하철에 몸을 던졌을 때는 사건 발생 개요에 이어 한 문장으로 된 자살 동기 분석과 역시 한 문장으로 된 열차 지연 사실을 병렬 배치한다. 자살 동기는 철저히 ‘개인화’된다. 생활고 비관, 성적 비관 같은 사유에 대해 사회적 맥락을 짚는 일은 드물다. ‘사회화’되는 것은 오직 공중의 피해(열차 지연)뿐이다. 택배 노동자 박종태씨 자살 보도도 이 프레임을 넘어서지 않고 있다.자살자가 유명 연예인일 때는 보도 전체에 상업주의가 관통한다. 조문 오는 동료 연예인들 모습 사진 한 장 한 장이 뉴스가 된다. 이른바 ‘조문 저널리즘’이다. 자살 동기와 관련해서도 온갖 추론이 쏟아지고, 이들 추론은 쑥덕공론과 괴소문으로 확산하며, 언론은
‘기자 저널리즘’과 ‘피디 저널리즘’이라는 개념 구분이 있다. 구분이란 비교를 거쳐 그 차이점을 도출한 뒤 카테고리화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어야 할텐데, 나는 그것이 뭔지 잘 모르겠다. 기자가 하면 기자 저널리즘이고 피디가 하면 피디 저널리즘이라는 정도라면 굳이 구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을 텐데 말이다.짐작가는 대목이 없진 않다. 이런 구분은 기자 저널리즘은 ‘기록’을, 피디 저널리즘은 ‘연출’을 중시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 같다. 경향적으로 그럴 수는 있겠다. 신문 기사나 방송 리포트는 분량이 짧다보니 사실관계만 압축해 전하는 기법이 발달했다. 이에 견줘 방송 시사 프로그램은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요소들을 동원한다.하지만 어느 경우도 ‘사실’에 입각하지 않
고전주의 미학이라면 이럴 땐 비극적이되 장엄하고 숭고한 이미지라야 한다. 지금 한국의 대중매체들이 재현해내는 애도의 퍼포먼스가 꼭 그렇다. 톡톡 튀는 목소리로 오락 프로그램을 진행하던 여성 아나운서는 라디오 뉴스에서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기사를 읽어 내려갔다. 신문 호외 편집도 더없이 무겁고 장중했다. 사람들의 보편적 심리상태도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지난 토요일 오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 소식을 처음 듣는 순간, 숙취로 절여진 내 전두엽을 치고 간 건 드라마 소품처럼 사소한 기억이었다. 경악하고 애달파하는 것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부조리해보였다. 내가 기억해낸 건 비교적 최근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어떤 예언이었다.한 지인이 달포 전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을 단정적으로 예측했다. 그는 주위
전국언론노동조합을 ‘친노 단체’로 규정한 진성호 한나라당 의원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다 국정감사를 방해한 혐의로 기소된 신학림 전 언론노조 위원장에게 집행유예가 선고됐다.서울중앙지법 형사7단독 이상무 판사는 26일 국회 회의장 소동 혐의로 기소된 신 전 위원장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신 전 위원장은 지난해 10월16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진성호 의원에게 “언론노조가 친노단체라는 근거를 대라”며 항의를 한 것과 관련해 고흥길 문방위원장에 의해 고발당했다.이와 관련해 검찰은 신 전 위원장에게 국회 모욕 혐의를 적용해 긴급체포하고 영장을 청구했으나 법원이 영장실질심사 단계에서 기각하기도 했다.진성호 의원은 지난해 방송통
미디어 관련 법안에 대한 국민 여론 수렴과 대안 도출을 위해 구성된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미디어위)는 활동시한을 한 달도 채 남겨놓지 않은 지금까지 한순간도 정상적인 활동을 해보지 못했다. 한국의 미래 미디어 지형은 물론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돌이키기 힘든 결정을 해야 하는 기구의 중간 성적표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다. 이런 식으로 활동을 마치고 나면 그 폐해가 어디까지 미칠지 가늠하기조차 어렵지만, 지금 당장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미디어위 위원 자신들을 비롯한 지식인들이다. 이 분야의 ‘베스트 오브 베스트’만 추렸다는데도 이 지경이니, 이 나라 지식인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알 만하다는 오해를 살까 두렵다. 그들이 지식인 사회를 대표하지 않는다 치더라도, 추락한 평판은 지식인 사회 전체에 적용될 수밖
에서도 독자 반응이 가장 뜨거운 기사는 역시 연예 관련 기사다. 포털은 절대온도는 훨씬 높지만, 거대한 방문자 규모 덕분에 콘텐츠의 소비 식생이나마 다양한 편이다. 독자의 쏠림 현상은 규모가 ‘겸손’하면서 소재마저 진중한 매체들에서 오히려 심하다. 미디어스도 선정성을 배격하고, 사유적이고 메타적으로 연예 관련 기사를 다루려고 하지만, 결과는 다른 매체들과 별반 차이가 없다. 연예 관련 기사는 내용과 상관없이 소재 자체가 이미 선정성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연예계(인)에 대한 쑥덕공론이 한국사회 담론 숲의 지배적 우점종이 된 세태의 한 삽화가 아닌가 싶다. 지난주 미디어스 방문자수를 끌어올린 1등 공신은 단연 설경구와 송윤아였다. 미디어스가 다룬 건
박찬욱 감독의 가 칸 영화제 본선에 진출했다. 예전 같으면 언론은 본선 진출만으로도 호들갑을 떨었겠지만, 이젠 그랑프리 정도는 먹어야 아드레날린을 분출한다. 그만큼 한국영화의 위상이 높아졌다. 90년대 이후 한국영화 르네상스는 역설적으로 80년대 계열의 ‘방화’가 밑절미가 됐다. 애마부인 연작은 성애에 대한 집착이 아니다. 표현의 자유가 존재하지 않던 시절, 저항을 포기한 영화계의 음울한 엑소더스였다. 표현에 대한 욕망은 지각 아래에서 에너지로 다져졌고, 때를 만나 지각 위로 솟아 폭발하듯 꽃을 피웠다.TV 시사 다큐멘터리가 연성화한다는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가장 지배적인 현상은 탈정치화다. 시사교양프로그램의 잇단 스포츠 스타 성공기가 대표적이다. 물론 이런 소재가 부적합하거나 의미
서울남부지검은 최상재 언론노조위원장에게 업무방해와 집회및시위에관한법률 위반 혐의 등을 적용해 불구속 기소했다고 15일 밝혔다. 박성제 전 MBC 본부장도 최 위원장과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으며, 정영하 전 MBC 본부사무처장, 최성혁 전 MBC 본부교섭쟁의국장 등 2명은 업무방해 혐의로 불구속 기소됐다.검찰은 언론관계법 저지를 위해 언론노조가 지난해 12월26일부터 올해 1월7일까지 벌인 총파업과 지난 2월26일부터 3월3일까지 벌인 총파업으로 MBC 본사와 지방계열사 등의 업무를 방해했다고 밝혔다. 지난 2월28일 서울 프레스센터 앞에서 ‘언론장악 저지 결의대회’를 개최한 것에 대해서는 미신고 집회라는 이유로, 언론노조 총파업 첫날인 지난해 12월26일 결의대회 이후 한나라당사 앞에서
광고를 흔히 ‘자본주의의 꽃’이라고 부른다. 광고학을 전공하거나 광고를 업으로 삼는 사람들에게는 우쭐한 메타포일 것이다. 제작자라면 광고의 ‘표현’이 꽃만큼 탁월하다는 미학적 자부심을 느낄 만도 하다. 하지만 ‘꽃’에는 반드시 관상(觀賞)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광고가 자본주의의 꽃이면 자본주의는 광고의 나무 기둥이거나 뿌리가 된다. 광고는 자본주의를 번식시킨다. 광고는 ‘자본주의의 성기’이기도 하다.어쨌든, 광고의 표현 전략은 치밀하고, 표현 결과는 탁월하다. ‘설득’과 관련한 모든 지식과 감각을 총동원해 한 장의 사진이나 15~30초짜리 영상, 몇마디의 카피와 음향/음악 따위 표현 장치들을 재구성해, 보는 이의 소비욕망을 ‘창조’하려는, 고집적(高集積) 기획 표현물이
일본말 ‘야마’는 우리말 ‘뫼’(山)와 같다. 일본 영화 을 보면 “야마요 야마요~”를 되풀이하는 이른바 ‘야마요 송’이 나오는데, 노래를 부르는 이들의 율동이 모두 산 모양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한국에서는 이 ‘야마’가 몇가지 은어로 자리잡았다. ‘야마 돈다’는 달리 설명이 필요 없을 듯하고, 철공소에서는 나사의 톱니 마루 부분을 ‘야마’라고 부른다. 하지만 이 ‘야마’를 언론계만큼 자주, 또 ‘심오’하게 쓰는 집단도 없는 것 같다.기자들끼리 업무와 관련해 가장 자주 쓰는 표현이 “팩트가 무엇이냐”와 “야마가 무엇이냐”다. 여기서 말하는 ‘야마’는 ‘기사의 주제와 문제 설정’ 쯤에 해당하는데, 이렇게 정색하고 개념을 설명하는 것이 멋쩍을 만큼 저널리스트라는 직업의 장(場)에서의 아
보릿고개 기민들의 눈에 허연 쌀밥 광주리를 머리에 인 것처럼 비쳐 이름 붙었다는 이팝나무의 꽃이 제 차례를 맞고, 물기 어린 그들 눈에 더 큰 배고픔의 기억으로 어룽댈 찔레꽃은 아직 가지와 이파리 속에서 만개(滿開)의 꿈으로만 차오르는 꼭 이맘 때, 난 그대와 자전거에 몸을 싣고 달린 적이 있다. 몇 해 전이었다. 햇살은 바투 붙은 쉼표 행렬 같은 자전거 바퀴살과 하얀 치아에 분홍빛 잇몸까지 드러낸 그대의 웃음에 튕겨 자잘히 부서지고, 만조를 만난 한강 아랫자락은 효모가 든 밀가루 반죽처럼 아득히 부풀어 비릿한 갯내가 내륙의 물가까지 가득 거슬러 오르고 있었다. 그 해 봄은 자글자글한 행복으로 충만했다. 그 위로 싸구려 자전거 두 대가 느린 시간의 길 위를 나란히 저어가고 있었다.김훈의
이 글은 5·6월호에 실은 글입니다. 격월간지 특성상 글이 깁니다(200자 원고지 70매). 쉬엄쉬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붕어빵에는 붕어 비늘 하나 들어 있지 않고, 칼국수를 삼키더라도 날카로운 칼날에 베이는 일은 없다. 이명박 정권의 ‘녹색성장’은 푸름의 가치(생태/평화/공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저 빨주노초파남보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은 색도(色度)의 관형어일 뿐이다. ‘녹색’이라는 관형어의 부채꼴 양쪽 끝은 아득히 멀다. 녹색과 민족주의 우생학이 만나면 인종대청소의 이데올로기
한나라당이 ‘예상대로’ 참패한 재보궐 선거와, 그 선거 결과를 ‘국민의 심판’으로 겸허히 받아들인다면서도 (역사적으로 모든 집권세력들이 그랬던 것처럼) 6월 미디어관련법 강행 처리 방침과 촛불 집회에 대한 ‘폭력적 법치’ 등을 포함한 자가당착적 헛발질 처방을 내놓은 것과, 14년 만에 전직 대통령이 검찰에 불려가는 스펙터클을 헬기 부감 숏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지난 한 주는 한국사회의 지배적 풍속이 역시 ‘진부한 다이내미즘’이라는 걸 일깨운 시간이었다. 또한 지난 한 주는 생활계의 귀한 이슈나 나름 사유(思惟)가 필요한 이슈들에게는 이들 진부하거나 다이내믹한 대형 이슈들의 그림자에 가린 짙은 망각의 시간이었다.지난주, KBS에 대한 대법원 기자단의 ‘1년 출입정지’ 조치가 있었다. 기자들이 아니면 대부분
법원의 판결 결과는 대개 개인에게 귀속되지만, 결국 사회적 규범을 규정하는 구실까지 하게 된다. 이때 법원과 사회를 매개해주는 것은 역시 언론이다. 그만큼 언론의 판결 보도와 해석은 정확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고, 오히려 언론이 의도적으로 왜곡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1997년과 2002년 대선 당시 이회창 후보 두 아들의 병역 비리 의혹이 큰 논란이 됐었다. 이와 관련해 대법원은 2004년 병무 비리 전문가 김대업씨에게 무고와 명예훼손 등으로 징역 1년10월을 선고했다. 대다수 언론은 김씨를 ‘공작정치의 대가’라고 낙인찍었다. 그 낙인은 2007년 대선에서 “BBK 의혹 역시 공작정치”라는 정치선전에 동원됐다.그러나 김씨가 유죄 판결을 받은 것은 1997년 이 후보 쪽 인사들과
는 ‘장자연 리스트’ 사태 맞자 이중적 태도로 돌변 ※ 이 글은 2009년 5월1일자 758호에 실린 글입니다. 법이 ‘해석’의 놀음이라면 기사는 ‘야마’(기사의 주제와 문제 설정 정도를 뜻하는 언론계의 일본말 은어)의 놀음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는 법이 해석 과정에서 타락해버린 실태를 겨냥한 약자들의 절규나 저주다. 언론에서 야마는 팩트(사실)를 비추는 거울이다. 평면거울일 수도 있지만 볼록거울이거나 오목거울일 때도 많다.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의도적일 때도 많다. 정치 검찰은 자의적인 법 해석으로 억울한 피해자를 양산하고 비뚤어진 언론은 자의적인 야마를 통해 진실을 왜곡한다. 둘 다 틀과 방향을 미리 정해놓고 거기에 사실을 꿰어맞추는 것도 닮았다. 그런 탓인지 둘은 궁합까
고등학교 쉬는 시간에 까까머리 사내녀석 둘이 교실 한귀퉁이에서 담임 선생님을 흉본다.“우리 담탱이 미친 놈 아냐?”그러다 열린 문으로 슬쩍 들어온 선생님한테 들키고 만다.당신이 그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군사부일체”를 운운하고 “교권이 땅에 떨어졌다”고 개탄하다 “내일까지 부모님 모시고 와”라고 할 텐가, 아니면 속으로 분을 삭이며 못 들은 척할 텐가?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같으면 곧바로 주먹과 발길을 날렸을 테지만, 폰카와 인터넷 하나면 기록하고 전파하지 못할 것이 없는 요즘 세상에 그럴 수는 없을 테고….이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 싶다. 나지막히 말하는 거다.“담탱이 욕하는 놈 치고 정신 멀쩡한 놈 못 봤다.”아니면,“한 번 봐준다. 다음에 내 욕할 땐 교문 밖에서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