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C인사이드 대표 김유식씨는 언젠가 기자를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한국의 인터넷 문화에서 특징적인 것은 한번 1위에서 밀려난 서비스는 재탈환에 성공한 역사가 없다. 커뮤니티 유료화를 추구했던 C모 포털이 그랬고, 동창회 싸이트 I모 싸이트가 그랬다. 온라인 우표제를 추진하던 D모 포털은 어떤가. N포털에게 밀려 다시는 1위를 차지할 수 없게 되지 않았는가.” (아마 인터넷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저 이니셜이 어디를 지칭하는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비록 한물 갔다는 소리는 들을지는 몰라도 아직 완전히 망한 것은 아니므로 이니셜 처리를 합니다) 저는 지난 주 트위터에 대한 기사를 썼습니다. 그 전 주 hannaracentris 아이디에 대한 기사를 쓴
누군가 일기를 쓴다고 했을 때, 그 행위의 의미는 나이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 작용을 발생시킨다. 개학 직전에 지나간 시간을 원망하며 후루룩 후루룩 말 듯 써내려가는 초등학생의 일기는 그저 하루하루를 색다르게 포장해야 하는 고역이다. 그러나 생의 황혼녘에서 쓰여 지는 어느 노인의 일기라면 다르다. 하루의 일기일지라도 살아온 인생 전체를 정갈하게 반추하는 정성스런 기록일 수밖에 없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는 그의 평생 애칭이었던 DJ라고 쓰겠다)의 마지막 일기가 공개됐다. 오늘 공개된 DJ의 일기에는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과 나이를 잊게 하는 결의가 있었다. 그의 죽음이 단순히 전직 대통령의 생물학적 죽음이 아닌 우리가 이루고자 했던 한 시대의 마감으로 애도돼야 하는 까닭이 쓰여 있었다. DJ 서거
방송통신위원회, 감사원 그리고 검찰, 아니 현 정권이 총동원되어 정연주 KBS 전 사장(?)에게 씌운 업무상 배임 혐의에 대해 지난 8월18일 법원의 최종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상식 있는 시민 언론 단체나 정치인들은 일제히 '환영' 논평이나 성명을 발표했음은 물론이다. '사필귀정'이 역사의 박물관으로 처박히지 않았음을 보여준 판결에 대한 반응들이다.이번 판결의 핵심은 두 가지를 둘러싼 것이다. 하나는, KBS가 내야 할 법인세와 부가가치세를 산정하는 방법과 관련해 국세청과 기한을 알 수 없는 조세소송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서을고등법원이 마련한 'KBS의 법인세 및 부가가치세 환급 조정권고안'을 정 전 사장이 수용함으로써 KBS에 심각한 손해를 끼쳤는지 여부다. 다른 하나는, 정 전 사장이 자
사람은 무엇으로 성장할까. 물론 제도권의 교육도 그 성장의 한 몫을 담당하지만 나는 행동하는 양심과 독서라고 생각한다. 물론 동서고금의 지식을 채득하는 독서가 가장 기본적인 사람을 키우는 것이지만, 결국 그 지식을 정말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배움에 맞춰서 행하는 실천이다. 그런데 그 실천은 대부분 제도권의 거센 도전을 받기 마련이고, 유배나 감옥이라는 고립된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는다. 하지만 이 유배나 감옥은 순간적으로 몸을 가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때로는 그 갇힌 자에게 더 큰 성장을 주기도 한다. 나에게 그런 이들을 본 추억을 말하라면 나는 몇 사람을 떠올릴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나 추사 김정희도 그런 이들이고, 돌아가신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문익환 선생, 신영복 선생도 그런 분이다. 또
결국, 예정과 예측에서 한 치도 이탈하지 않았다. 고 장자연씨에게 술 접대 등을 강요하고 이를 방조 혹은 받은 혐의로 수사를 받아 온 언론사 대표, 금융관계자, 드라마 감독 등 유력인사들이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경찰은 장씨에게 술 접대를 강요하며 폭행과 협박을 일삼았다는 소속사 전 대표 김모씨마저 불구속 기소했다. 이로써 전격적인 수사착수 이후 수사보류와 재수사를 거듭하며 전국을 연예인 사생활 관음으로 몰아넣었던 4개월간의 장정은 한 바탕 꿈, 허무개그로 끝나고 말았다. 고 장자연 사건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이었나, 그리고 무엇을 남겼나? 흔한 말로 '사회적 공기' 또는 '사회의 목탁'이라 불리는 언론에게 장자연은 누구였냐 말이다.처음에는 어느 무명 연예인의 있을법한 자살이었다. 평소
이명박 정부는 모든 규제를 경제적 해악으로 보는 모양이다. 다시 말해 규제는 경쟁을 제약함으로써 경제발전을 저해한다고 믿는 것 같다. 그 때문이지 취임초부터 규제철폐를 강행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균형 있는 경제발전을 위해 존속할 가치가 있는 규제까지 철폐함으로써 경제적 약자의 존립을 위협한다는 점이다. 맹목적적인 규제완화는 독과점을 심화시킴으로써 빈부격차가 더 벌어질 수 밖에 없다. 반면에 거대자본의 입장에서 규제완화는 곧 돈이다.모든 규제는 완화 이전에 존속할 가치가 있는지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경제적-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규제는 완화대상이 아니다. 경제질서에 관한 규제 역시 완화대상이 될 수 없다.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한 규제, 공공복리를 위한 규제, 환경보존을 위한 규제 등등은 완화대상
‘Fox 효과’를 아십니까? 루퍼트 머독의 뉴스 코퍼레이션 그룹의 방송사인 Fox는 9.11 폭탄 사건이 터지자 미국 저널리즘을 주도했다. 연일 국수적 국가주의, 애국심, 강력한 미국, 성조기를 앞세워 응징을 주장했다. 네오콘의 든든한 친구를 자임했다. 덕분에 미국은 제조된 애국심이 넘쳤고, 중동에서의 전쟁에 기꺼이 참여할 준비를 하는 듯 했다. 타 방송사는 Fox의 선정성을 외면했지만 정작 시청자들은 Fox의 뉴스에 열광했다. 경쟁 네트웍들은 Fox식의 뉴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바로 ‘Fox 효과’다. 머독, 비즈니스를 위한 정치, 정치를 통한 미디어 비즈니스 만들기Fox의 힘은 곧 거대 복합 미디어기업의 힘이었다. Fox 방송의 실질적 소유주인 루퍼트 머독은 52개국에서 800여종의 미
충격의 출산율 ‘1’의 붕괴가 눈앞에 닥쳤다. 출산율은 15∼49세의 가임여성이 평생 동안 낳는 평균 자녀수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출산율 1이 무너지면 자녀를 1명도 낳지 않는 여성이 늘어난다는 뜻이다. 만혼, 독신, 이혼, 피임 등의 이유로 출산율이 꾸준히 낮아지다 지난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인 1.19로 떨어졌다. 그런데 경제위기로 주력출산층인 25∼34세 여성들이 결혼과 임신을 미루는 바람에 내년에는 마의 벽인 출산율 1이 무너질 듯하다.15∼49세의 가임여성 자체가 줄고 있다. 올해 가임여성 인구추계는 1,303만5,000명으로서 작년보다 47만2,000명이나 감소해 2000년 이후 감소폭이 가장 클 것으로 예상된다. 가임여성 중에서 출산의 80%를 차지하는 25∼34세 인구는 올해 372만7,0
늦깎이로 대학을 다닌 내 때만 해도 민중문학이라는 단어가 살아있었다. 창비(창작과 비평)나 실천문학에서 나온 문학서도 그랬지만, 문지(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글들에도 참여에 대한 의지들이 녹아 있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내가 중국에 있었던 10년(99년~08년) 사이에 거의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는다.이런 느낌은 이제 더 이상 독재나 인권유린 같은 일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예단 때문이라는 판단이 든다. 용산참사나 어처구니가 없는 정치 상황을 보면서 이제 그런 느낌이 얼마나 허상이었는가를 절감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힘을 쓰기 시작한 이들이 있다는 것은 희망이다. 무엇보다 안심이 되는 것은 ‘창비’(창작과 비평사)가 전투모드를 찾은 것이다. 사실 과거 창비가 주는 의미
오늘 동아일보에 '민노총 가입 석 달 만에 깨진 32년 노사평화'라는 제목의 사설이 실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가 던진 충격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가 시대와 사회에 남긴 메시지는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성찰과 슬픔에 젖은 날, 동아일보의 태도는 여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을 '지역주의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라고 규정하는 동아일보의 사설을 그들의 논리적 원형을 그대로 사용하여 살짝 뒤집기만 했다. 너무나 속보이는 그들의 편성과 논리를 단어 몇개만 살짝 바꿔, 문장의 주어들만 약간 고쳐 그들에게 그대로 돌려준다. 의 재활용은 계속된다. 사설을 뒤집으면 '설사'이다.
새로운 시대의 문화적 코드, ‘평범함’이별은 손끝에 있고 / 서러움은 먼데서 온다 / 강 언덕 풀잎들이 돋아나며 / 아침 햇살에 핏줄이 일어선다 / 마른 풀잎들은 더 깊이 숨을 쉬고 / 아침 산그늘 속에 / 산벚꽃은 피어서 희다 / 누가 알랴 사람마다 / 누구도 닿지 않는 고독이 있다는 것을 / 돌아앉은 산들은 외롭고 / 마주보는 산은 흰 이마가 서럽다 / 아픈 데서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 슬픔은 손 끝에 닿지만 / 고통은 천천히 꽃처럼 피어난다 / 저문 산 아래 / 쓸쓸히 서 있는 사람아 / 뒤로 오는 여인이 더 다정하듯이 / 그리운 것들은 다 산 뒤에 있다 / 사람들은 왜 모를까 봄이 되면 / 손에 닿지 않는 것들이 꽃이 된다는 것을 (김용택, ‘사람들은 왜 모를까’) 오늘날 우리는 이
1916년 ‘승리 없는 평화(peace without victory)’를 슬로건으로 반전 공약을 내세워 대통령에 당선된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은 그때까지 반전 국가였던 미국을 전쟁에 참가시키기로 한다. 그러자 무엇보다 남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참가하고 싶어 하지 않는 국민들을 설득해야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연방 선전 기관 ‘연방공보위원회(United States Committee on Public Information)’이 탄생했다. 조지 크릴(George Creel)이라는 인물이 이끄는 이 위원회는 국민을 선동해 호전적 애국주의에 광분하게 만드는 갖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위원회의 선전 전략은 적중했다. 반독일 정서가 하늘을 찔렀고, 반전 여론은 삽시간에 돌아섰다
광복절을 앞두고 11일 법무부가 특별사면을 발표했다. 이번에도 152만여 명의 대규모 사면이 이뤄질 예정이라고 한다. 정부는 이번 사면을 ‘생계형 사면’, ‘친서민 정책’이라며 적극 의미를 부여하고 나섰다. 정부의 이번 특별사면으로 구제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사면’이 꼭 필요한 ‘서민’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명박 정권이 불과 집권 2년 만에 이전 정권들이 집권기간 동안 시행한 것과 비슷한 규모의 사면을 단행했다는 점에서 뒷맛이 개운치는 않다. 더욱이 사면의 내용에 대해서도 문제가 지적되고 있다. 두 번 이상의 음주운전자는 제외됐다고 하지만, 음주운전 등으로 면허가 취소 또는 정지된 사람들을 사면한 것은 자칫 준법의식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생계형 사면’이라면서
새로운 밤손님이 등장하였다. 이 새로운 밤손님은 공개적으로 훔치지만 누구도 도둑맞진 않는데, 왜냐하면 그가 ‘공통의 것’을 훔치기 때문이다. 우선, 라는 영화를 훔쳤다. 아니, 영화 제목이 “이 영화를 훔쳐라”인데 훔친 게 맞냐고? 영화 제목이야 어쨌든, 이 영화는 엄연히 ‘Copyright ⓒ’ 달고 있는 ‘소유된’ 영화이다. 진보넷이 훔친 영화는 8/18(화) 늦은 8시 인디스페이스에서 공개적으로 상영, 복사, 재 배포될 예정이다. ‘도둑질’을 성립시키기 위해서 저작권자의 어떠한 허락도 받지 않았다. 브라보!이 영화는 저작권에 대한 영화이다. 저작권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 역사에서부터 오늘날 우리가 처하고 있는 문화적 재생산의 환경까지를 아우르는! 역사에는 하나의 반복이 등장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병세가 악화된 채 오랜 시간이 지속되자, 그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 또한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병원 중환자실을 찾았다. “화해한 것으로 봐도 좋다”고 보도된 그의 말은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자아냈다. 하지만 조깅을 열심히 한 덕분에 아직까지 건강한 김 전 대통령의 발언 중 한 문장만큼은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었다. YS는 ‘우리가 함께 잘 싸워서 민주주의를 이뤘다. 아니었다면 버마처럼 되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역시 사람은 평소에 이미지 관리를 잘 해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 내용을 기사로 읽으면서도 의미 있는 내용으로 인지하지 못했으리라 추정된다. YS가 한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 말을 DJ가 했다면 큰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실로 버마의 상황
다시 태어난 리바이어던(Leviathan)반 년 전 용산의 참사, 그리고 평택 쌍용차 노동자의 77일간 투쟁, 여기에는 모두 국가의 폭력이 있었다. 우리는 여기서 국가의 ‘폭력’ 문제를 다시금 되돌아볼 수밖에 없다. 계급투쟁의 역사에서 다른 사람의 의도에 반해 특정한 이해관계의 관철을 위해 강제수단을 행사하는 ‘폭력(Gewalt)’의 문제는 철학적으로 주요한 문제 중 하나이다. 베버는 근대국가가 폭력을 독점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공권력으로서의 폭력이 특정계급의 이해관계를 관철하고자 하는 것으로 정치적 강제 수단으로 사용된다는 점이다.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자본주의적 삶의 원리와 가치를 옹호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본의 탐욕이 생산하는 부산물은 인간을 생존의 벼랑으로 몰아가며 사람들은 인간
중앙일보가 지난 11일 청와대가 인사수석비서관을 부활하기로 사실상 방침을 굳히고 후보자를 물색 중이라고 보도했다. 후보군으로 “현재로선 신재민 문광부 제1차관 등이 거론되고 있다”며 이라는 제목으로 1면 하단에 굵직하게 보도했다. 이에 대해 매일경제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는 인사수석비서관실 부활에 대해 "검토된 바 없다"고 일축했다.청와대 관계자는 "아이디어 차원에서 제기될 수 있는 문제이지만 추진되는 사안은 아니다"라고 밝혀 사실상 인사수석석비서관실 신설과 신재민 차관 거론설을 완전 부인했다. 단순한 중앙일보의 오보였을까. 중앙일보는 인사수석비서관실보다 신재민에 힘을 준 듯한 보도를 했는데, 이것이 과연 오보임을 모르고 보도한 오보일까 아니면 오보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 광화문 네거리 앞 작은 광장들. 전광판을 보며 ‘붉은 악마’든 아니든 축구경기가 있는 날이면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마음껏 함께 부르고 함께 외쳤던 적이 있었다. 아득한 그 옛날에. 오로지 한 점, 한국 팀 승리를 향한 일치단결이요 축제였다. 응원가가 함성이 아쉬운 탄식이 ‘축구장’에 들리든 들리지 않든 그렇게 함께 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08년부터 ‘거리응원’이 사라져버렸다. 한국 팀이 A매치를 해도 광화문의 광장들은 텅 비어 있다. 붉은 악마와 붉은 악마처럼 함께 하는 그들이 사라져 버린 걸까. 아니면 광장이 사라져 버린 걸까.우리는 안다. 열정과 열광을 소비하던 그들, 사람들이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라 광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광장이 없어지고 봉쇄당함으로써 그
개인적으로 가장 곤혹스런 취재를 꼽으라면 장례식장 취재다. 유명인사의 경우 조금 덜하지만, 갑작스런 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를 만나야 할 때면 참 ‘못할 짓이다’ 싶다. 요즘은 또 다른 곤혹감을 느낀다. 병세가 위중한 김대중 전 대통령 때문이다. 더군다나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다. 어쩌면 또 한 분을 떠나보내야 하는 건 아닌지, 쓸데없는 걱정이 더해진다. 물론 기사 방향은 쾌유를 비는 것이지만, 머릿속엔 만일의 상황까지 고려해 취재해야 하는 게 이놈의 직업 아닌가. 김 전 대통령에 대한 광주시민들의 애정은 각별하다. 역시 호남의 자식들인 지역 기자들 역시, ‘무례’에 대한 압박은 남다를 테다. 그런 가운데 지난 월요일의 경우 상당수 지역 신문 기자들이 김 전
청와대를 오른쪽으로 끼고 자하문 터널 쪽으로 오르다 보면 한 때 백운장이라 불리는 곳이 나온다. 지금은 그 자리만 남아 있을 뿐이지만 그곳엔 작소거(鵲巢居)란 이름의 큰 집이 있었다. 멀리 총독부 건물이 바라보이는 그 집의 주인은 1910년 한일합방부터 십여 년간 조선의 언론을 좌우했던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였다. 일본의 을 소유 운영하던 도쿠토미는 당시 일본 수상이던 가쓰라의 추천으로 일본의 식민경영을 훈수하게 된다. 한 해에 3-4주간 경성에 머물며 효율적 식민경영을 위한 언론통제, 이데올로기 전파를 거들었다. 조선의 자연을 사랑했고, 조선이 일본과 하나됨은 이미 하늘이 정한 운명과 같은 것이었다고 설파한 그가 경성을 떠나기 전까지 머물렀던 작소거엔 그를 따르는 조선 지식인들의 발길이 끊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