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의 사장이 바뀔 것인가, 아니면 이병순사장 체제로 유지될 것인가가 곧 결정된다.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KBS노조에 대한 최소한의 기대를 접은 지 오래된 상황인지라, 필자의 입장에서는 KBS노조의 입장은 중요하지 않다. 이병순 현 KBS사장을 지지하든 하지 않든 이미 KBS노조의 입장은 미디어운동진영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은 상황. 문제는 사원행동이다. KBS사원행동이 지난 2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보여준 입장, KBS노조와 다른 입장과 전혀 다른 실천을 높이 사는 것은 필자의 평가뿐만은 아니다. 그래서 사원행동의 입장과 의지를 귀기울여 들어야 할 터. KBS사원행동. 지금에야 그 이름이 어떻게 바뀌었든, 지난 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그리고 징계와 강제전출의 수난을 겪어던 사원행동이,
패륜을 양산하는 법 아들이 아버지를 죽였다고 한다. 무슨 오이디푸스 신화에서처럼 신탁이라도 받았단 말인가. 이제 그 아들은 자신의 눈을 찌르고 사막으로 고행이라도 떠나야 한다는 말인가. 현대의 오이디푸스는 신탁 대신 법탁을 받고, 사막 대신 감옥으로 가야 한다. 얼추 오이디푸스 신화의 현대 버전 정도 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스스로 고행을 떠나는데 반해 현대의 아들은 아버지를 죽이지 않았지만 지배 권력에 의해 고행을 떠나게 되었다는 사실만 빼면 말이다. 그래도 확실히 비극은 비극이다.지난 달 28일에 있었던 용산 참사 관련 재판의 결과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이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충연 용산4구역철대위원장 등 피고인 2명에게 6년형을 선고했고, 다른 피고인 5명에 대해서도
흔한 말로 정치를 생물이라고 한다. 진화와 능동을 가르는 냉철한 변증법과 선택과 집중을 결정하는 열정의 의지로 정치가 매순간 파닥인다(혹은 일 수 있다)는 뜻일 테다. 그렇다면, 제1야당 민주당은 어떠한가? 진화하고 있는가? 능동적인가? 선택은 적절한가? 집중은 충분한 것인가? 정세에 대처하는 민주당의 변증법과 사태에 임하는 민주당의 의지가 과연 어떠하냐는 말이다. 한 마디로 '아니올시다'이다. 생각도 하기 전에 머리가 지끈거리고 깊은 회의감부터 밀려든다. 언제부터인가 민주당은 도무지 정치가 안 된다. 아주 호기로운 순간도 있었건만, 좀처럼 정치를 생물로 만들지 못하고 있다. 유예되고 잠복해있던 민주당의 문제들, 무기력하고 또 무기력한 민주당의 정치가 헌재 판결 이후 그 앙상함을 확실히 드러내고 있다.
당신에게 '스포츠'는 무엇입니까? 스포츠를 잘 '하고' 싶은 마음 만큼이나 스포츠를 잘 '읽고' 싶다는 욕구가 큰 시절입니다. 하는 스포츠와 보는 스포츠의 경합속에서 그만큼 스포츠는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고 있지만, 보다 정밀하게 스포츠를 읽고 싶다는 욕심이 못내 간지러운 것이 사실입니다. 때 마침, 야구도 끝나고 이제 무슨 재미로 사냐라는 분들을 위해, 에서 보다 풍성한 스포츠 읽기를 위한 고품격 교양을 제공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체육교사이자 스포츠사회학자인 미디어스의 필진 남상우씨가 전공자의 전문성으로 그리고 지적 호기심과 열정을 총동원하여 "스포츠 지식문화사" 시리즈 연재를 시작합니다. 꼼꼼하게 따라 읽다 보면, 분명 내년 봄 당신의 스포츠는 훨씬 풍성해질 겁니다.
전세대란이란 언론보도가 잠잠하다. 하지만 전세파동이 가라앉은 것이 아니다. 비슷한 기사를 반복적으로 쓰기 어려우니 언론보도가 줄었을 뿐이다. 전세파동이 더 싼 셋집을 찾아 서울, 수도권을 넘어 경기도 일원으로 급속하게 확산되는 양상이다. 강남 지역의 전세수요만 해도 안양, 군포, 의왕, 과천 등지로 몰려 안양권에는 매물이 바닥났다. 문제의 심각성은 전세파동이 내년, 내후년에도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명박 정부 집권기간 내내 전세파동이 극성을 부린다는 소리다. 무분별-무계획한 뉴타운, 재개발, 재건축 사업이 멀쩡한 집들을 마구 헐어내기 때문이다. 한나라당이 지난해 4월 총선에서 엉터리 뉴타운 공약으로 당선의 단맛을 즐겼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내년 6월 지방선거에서는 낙선의 쓴맛이 기다릴
최근 한 달 사이 광주에선 환호와 혼란이 뒤섞이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프로야구 기아타이거즈가 12년 만에 우승하면서 광주시민들이 한풀이라도 한 듯 축제분위기였죠.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그 기쁨은 광주시의 돔야구장 건설 계획발표로 일대 혼란 속에 파묻혀버렸습니다.야구장. 처음엔 저도 혹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전천후 경기장에서 언제든 야구경기가 가능하고 또 하나의 문화공간으로 사용할 수도 있겠다싶었죠. 하지만 갈수록 이게 아니다싶어집니다. 돔구장 자체의 친환경성 문제나 선수들 부상위험도, 또는 개방형에 비해 4배에 달하는 건설비용이나 민자유치에 따른 특혜의혹 등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무엇보다 이 일을 밀어붙이는 광주시의 방식과 태도 때문입니다. 지난달
권력은 작동방식을 따지자면 복잡하지만, 그 속성과 스타일은 의외로 간단히 규정할 수도 있다. 대개의 권력은 과거 지향적인 속성을 같고, 언제나는 아니겠지만 또 숱한 권력들의 스타일은 보통 돌고 돌아 회귀적 스타일을 띈다.청와대가 공보담당관제를 도입하겠다고 한다. 각 비서관실 마다 언론 상대 업무를 담당하는 특정한 창구, 즉 공보관을 두겠다는 얘기이다. 흔한 말로 창구의 단일화 되겠다. 운용 시점까지 못 박았다. 대통령의 재가가 나는 대로, 늦어도 이달 중순에는 바로 시행하겠다고 한다. ‘공보관’이란 말이 왠지 촌스러운 것처럼 분명, 언젠가 본 듯한 풍경이다. 완전히 흡사하진 않지만, 역사의 반복이라고 하기에 큰 무리는 없을 정도이다. 참여정부 말기에도 비슷한 장면이 있었다. 참여정부는 기자실을
한국 영화계가 '죄다' 좌파라고 한 윤계상의 발언은 분명 당황스런 일이다. 물론, 세상사를 설명하며 '죄다'라고 하는 부사를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그의 의식이 덜 여물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설익음을 이유로 그가 면죄부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문제가 비록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개념의 엄밀함을 벗어난 것뿐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발언에 부당함을 느끼는 대중이 존재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다. 그야 논란이 될 줄 몰랐다고 했고, 거듭 사과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하필 아이돌 출신으로 영화계에서 여전히 이질감을 느낀다는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그는 '좌파'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일까? 그의 표현대로라면 분명, 잘 모르는 단어였을 텐데 말이다.
너희들이 게 맛을 알아? 게맛살이라는 이름의 상품은 사실 게살로 만들지 않았다. 그러나 맛과 냄새는 비슷하다. 그런데 최소한 한 마리에 십 만원이 훨씬 넘는 진품 영덕 대게를 먹어 본 사람은 그 맛이 뭔가 다르다고 한다.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다르다고 한다. 진짜 대게와 게맛살의 차이는 그 맛을 느끼는 사람의 감각을 충족시켜주지만, 명품과 짝퉁의 차이에서도 이런 감각적인 차이가 있을까? 물론 그것은 감각적인 만족이라기보다는 보통 현시 가치나 기호 가치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차별적인 만족을 준다고 한다. 자본주의에서 본래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는 여전히 이론적으로는 모호하더라도 양화된 가격으로 나타나는 교환가치는 확실하다. 향유할 수 있는 자와 그럴 수 없는 자를 사회적으로 차별화하고 차이를 재생산하여 다음
소설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사실 지난주에 결혼식 참가를 위해 대구에 내려가다가 문득 써보고 싶은 소설이 생겼다. 순간적으로 생각해낸 공간들이 좋았고,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가을 산빛과 내 추억이 담긴 장소들이 어우러졌기 때문에 잘 묶으면 괜찮은 단편소설이 하나 될 것 같아서다. 하지만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다가 금방 싱거워졌다. 결국 글을 쓰면서 느끼는 내 문장은 마치 서평을 쓰는 문체 마냥 딱딱하고 단조로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과연 이렇게 쓴 것이 제대로 소설로 그려질까를 고민하다가 멈췄다. 물론 조만간에 다시 글쓰기를 재개해서 어느 문학잡지의 공모에 낼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소설쓰기가 순간의 감상만으로 완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은 비교적 단순하다. 젊은 시절에는 새로운 장르
미디어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내려졌다. 논란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헌재의 판결은 헌법재판소다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번 헌재의 결정을 권력의 눈치를 본 타협의 산물이라고 정치적인 차원에서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판결문에 밝혀놓은 ‘의의’를 읽어보면, 반드시 헌재가 정부의 눈치를 보고 이런 판단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헌재는 이번 결정을 두고 “하자 있는 심의 표결절차에 터잡아 이루어진 법률안 가결선포행위가 국회의원인 청구인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하였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표결처리에서 절차상 하자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니 한나라당이라고 해서 환호작약할 일이 아니다. 문제는 헌재의 판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헌재가 설정하는 ‘어떤 민주주의’에 있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올바른 답을 찾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 질문이 잘못되었다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헌법학 교수였던 칼 슈미트가 던진 질문은 그런 차원에서 볼 때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안팎으로 엄습해오는 헌법적 위기 앞에서 그는 물었다. “누가 헌법의 수호자인가?”당대 최고의 헌법학 교수 중 한 사람이었던 한스 켈젠이 그 ‘떡밥’을 물었다. 칼 슈미트의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헌정체계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위협이 다가올 때, 그것을 지켜내야 할 최종적인 권한은 누구에게 있는가? ‘헌법의 수호자’라는 시적인 단어는 대단히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한스 켈젠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 떡밥을 있는 그대로 물지 않고, 대체 헌법의 수호자라는 게
헌법재판소는 국회의 미디어 법안 처리가 위법하다고 판정하면서도, 그것을 무효화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신문법 등 미디어 관련법은 ‘위법하지만 유효한’, 이상한 상태에 머물게 됐다.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은 권한쟁의 사건의 한계라고 할 수 있겠지만, 결국은 헌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2대 4대 3’ 판결신문법과 방송법 외에도 다른 법안도 관련되어 있고 9명의 헌재 재판관의 의견이 각 법안마다, 그리고 쟁점 마다 갈려서 제대로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신문법을 중심으로 각 재판관의 입장을 정리하면 이번 판결은 ‘2대 4대 3’의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 민형기, 목영준 재판관은 국회의장의 자율권이 존중되어야 한다면서 청구인들, 즉 야당 의원들의 권리가
지난 2009년 7월 22일, 하늘에서는 해가 달에 가리워지는 ‘우주쇼’가 펼쳐졌고, 바로 그날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는 개정미디어법을 놓고 ‘막장쇼’가 벌어졌었다. 당연하게도, ‘우주쇼’는 모든 지구인들의 탄성을 자아냈고, ‘막장쇼’는 대한민국 국민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불행하게도 황홀한 ‘우주쇼’는 언제 다시 올지 기약이 없건만, 다시는 오지 말았으면 했던 ‘막장쇼’는 시리즈로 계속된다. 그날의 ‘막장쇼’가 지나간지 3개월이 지난 10월 29일, 어이없는 ‘막장쇼’는 장소를 달리하여 재개봉한다. 이번엔 헌법재판소다.말장난헌법재판소 결정문이 언제나 중후하고 유려한 문장을 동원해 추상같은 권위가 넘쳐흘러야만 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대략 난감한 결정문을 통해 국민들로 하여금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드
언론법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10․29 결정을 보며, 해고 위협에 시달리는 이 나라에 사는 모든 노동자는 어떤 감정이 들었을까? 아마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을 것이며 전율을 느꼈을 것이다. 언론법에 관한 헌재 결정의 말만 바꾸면, 해고의 절차가 아무리 위법이라 해도 해고는 효력이 있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우리 아이가 이렇게 물을까 겁난다."아빠, 우리 반 반장 선거에서 대리투표가 있었는데, 그래도 뽑힌 반장은 반장이야?""아니야, 세상에 그런게 어딨니?"라는 내 대답에 아이가 "에이, 헌법재판소가 언론법에 대해 그랬다는데"라고 말하면 도대체 뭐라고 해야 하는가 말이다.해고 위협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이 헌재 결정을 본다면?헌법재판관들에게 묻고 싶다. 국회법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법인가? 헌법과 무관
다시, 헌법재판소이다. 최근 몇 년간의 어떤 사건들이 그랬던 것처럼 이제 모든 것은 헌법재판관 9명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달리게 됐다. 서로 끝까지 대립하여 단 한 순간도 만나지 않을 2개의 사회적 입장이 헌재 재판관 9명의 인식과 판단에 완전히 포박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 현 체제에서, 헌재는 누가 뭐래도 완성자이자 가장 확실한 종결자로 존재한다. 원론적으론 완전히 그렇고, 현실적으로도 대부분 그랬다. 상상 가능한 수준에서 이제 미디어법의 운명은 '언론법 권한쟁의'에 대한 헌재의 유무효 판단에 따라 완전히 다른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유효와 무효 사이의 중간적 결정은 없고, 헌재는 만장일치가 아니더라도 타협적 결론을 생산하지 않는 회로이다. 언론법이라고 하는 소우주 곳곳에 퍼져있던, 사회 제 세
기자가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권력자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본다. 예외가 없지 않지만 드물다. 좋은 기자도 그만큼 희귀하다. 언론사에 들어가면, 첫 6개월을 ‘수습 기자’로 지낸다. 경찰서 3~4곳을 맡아 기자 훈련을 시작한다. 갓 대학을 졸업한 20대 중후반의 신참 기자는 경찰서장과 ‘대당’한다. 수습 기자의 첫 임무는 서장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는 일이라는 우스개가 이 바닥에 있다. 서장을 당당히 대할 수 있어야 ‘출입처’인 경찰서를 장악할 수 있다는 믿음이 기자들에겐 있다.‘원론적으로’ 경찰 취재 경험은 좋은 기자의 자양분이 된다. 힘 있는 자는 경찰서에 가지 않는다. 힘없는 자들이 피해자 또는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앞에 줄지어 선다. 10여 년 전 겨울, 수습 기자가 되어 처음 경찰서 형
당신이 우연히 참사 현장을 목격한다면 사람을 구하겠는가, 취재를 해서 기사를 쓰겠는가? 초보 기자 시절, 선배로부터 한 번쯤 들어보는 물음이다. 전형적인 딜레마 상황이다. 그러나 한국 언론인들은 아주 깔끔하게 ‘선택’하는 것을 배우고, 이를 내면화한다. “인명 구조는 다른 사람도 할 수 있지만 취재·보도는 당신 말고 할 사람이 없다.” (지금도 똑같은 말을 주워섬기는 것은 시대착오다. 참사현장에는 이미 수많은 ‘폰카’가 있을 테니까.)모든 물음에는 가치가 전제돼 있다. 여론조사 결과를 온전히 신뢰하면 안 되는 몇 가지 이유 가운데는 ‘가치중립적인 물음은 없다’는 것도 포함된다. 프랑스 철학자 알튀세르가 ‘문제 설정’을 강조한 것도, 거칠게 풀이하면, 물음 안에 이미 답이 구조화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 붉은악마와 노사모 출연이 다른 한국 사회의 모습을 예고하는 호들갑의 징후였다면, 2000년 중반에 찾아온 몇 개의 사건들은 그 예고가 마냥 낭만적인 것만은 아닐 것임을 입증하는 경고였다. 2000년대 중반 연달아 일어난 사건들은 향후 한국 사회가 어떤 사회적 문법으로 작동할 지를 미리 알려준 굵직한 것들의 연속이었다. 근대의 패러다임인 '민족'이 여전히 포스트 모던의 미학인 영화를 지배함을 일깨워 준 '디워(D-WAR)' 논쟁이 그랬고, 자본과 그 밖의 취약한 것들이 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폭로한 삼성 X파일 사건도 중요한 한 가지였다. 그리고 황우석 사태가 있었다. 황우석 사태, 그것은 날조 된 신화였다. 황우석 교수의 연구는 어느 순간부터 과학이 아니었다. 그의 연구는 ‘난치병의
어제는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100주년이었다. 한국인으로서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불만(?)을 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안중근 의사를 둘러싼 세간의 논쟁을 둘러보다보면 1909년 이후 한국 근현대사 100년이 얼마나 숨가쁘게 흘러왔는지를 알 수 있는 듯해 서글프기까지 하다.테러리즘 논쟁 논쟁 하나는 이른바 ‘테러리스트’ 논쟁이다. 이것은 안중근에게만 관련된 것은 아닌데, 뉴라이트 논자들이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테러리스트’로 격하시킨다는 불만과 이에 대한 비판이 팽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나는 이 논쟁의 지형이 살짝 의아하다. 양쪽 모두 공히 “테러리스트는 나쁜 것이다.”는 전제 조건 하에 논의를 진행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그 판단을 공유하면서 뉴라이트는 독립투사의 아우